저널리스트 피터 현:9(나의 젊음,나의 사랑)[경향신문] 1997-02-17 34면    2792자
◎세계에 소개한 ‘한국 현대문학’서양 지식인의 왜곡된 ‘선’인식에 대한 비판을 영국의 권위지 ‘엔카운터’에 발표했다. 런던의 국제펜 본부서 원고청탁이 왔다. 한달간의 취재끝에 원고를 완성했다. ‘문화대사’로서의 업적이 또 한건 더해진 것이다.

김흥수 화백을 알게 된 이후 나는 50년대 중·후반 파리에 와 있던 한국 화가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남관, 이세득, 변종하, 권옥연 등이 그런 분들. 특히 권화백과 그의 부인 이병복과는 우리 「내외」와 아주 친하게 지냈다.

불행하게도 그 무렵 나와 시오도라의 관계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부쩍 소유욕이 심해지더니 내 여자 친구들을 무조건 질투하는 것이었다. 「영원한 자유를 추구하는 남자」에게 여자의 질투는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여 자기 남편을 떠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몇 달 동안 고민하고 잠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나서야 양심의 갈등을 정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느 날 시오도라가 외출한 틈을 타서 내 물건들을 모조리 친구 전익상의 부르바르 생 제르맹의 작업실로 옮겼다. 「아무래도 내가 떠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 두 사람을 위하는 일인 것 같다…」는 쪽지 한 장만 남기고. 그날 저녁 나는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냉전시대 유명작가 케슬러와의 만남
그 시절 나는 런던에 가면 늘 사교계 귀부인 제인 히튼(Lady Jane Heaton) 부인 댁에 머물곤 했다. 첼시 구역의 킹스 로드 근처에 있는 히튼 부인의 저택에는 게스트 룸이 2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는 주말마다 런던의 지식인 엘리트들을 모아 저녁파티를 열었다. 젊고 똑똑한 언론인들과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교수들이 주고받는 시사문제, 책, 화제의 인물들에 관한 통찰력 넘치는 대화가 이뤄지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오도라를 잊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시오도라의 「속박」에서 벗어날 즈음 파리에서 사귄 영국 여인 민 호그(Min Hogg)를 런던으로 불렀다. 그는 영국 왕실 주치의로 유명해진 외과의사의 딸로 고급 여성 월간지 「더 퀸」의 편집차장이었는데 나를 만나자 자기 잡지에 「한국의 궁중 보석」에 관해 글을 써달라고 청했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 우리 사이의 미완성 로맨스를 지금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수작했다. 결국 우리들의 로맨스는 다시 시작되었다. 시오도라는 내 뇌리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서양 지식인들과 지낸 수년 동안 나는 선에 대해 아는 척하는 그들의 왜곡된 인식을 비판해왔다. 서구적 선 인식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써 친구 스티븐 스펜더가 편집하는 월간 권위지 「엔카운터」에 발표했다. 이 글이 나가자 냉전시대의 유명 작가 아서 케슬러(Arthur Koestler)가 글에 대한 칭찬과 함께 자기 집 저녁에 초대하는 뜻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오의 암흑」의 작가로부터 글을 인정받았다는 것과 당시 누구나 선망하던 몽펠리에 스퀘어의 케슬러 댁 저녁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대단히 영광스럽고 명예로웠다.

나는 그를 만나 그의 첫소설 가운데 늙은 볼셰비키가 개인주의에 빠져 당규를 어기고 처형당하는 생생한 장면 묘사에 내가 얼마나 반했는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산문집 「실패한 신」을 한국어로 번역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6·25를 치르고 나서도 상당수 좌익 강경파들이 그들의 「신」 소련이 천사의 편에 서서 전세계 피압박 인민들을 돕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케슬러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 자신도 어린시절 공산주의라는 깊은 심연을 헤매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그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습니까. 그들이 순진하게 공산주의와 연애에 빠졌다가도 소련이나 북한의 현실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겁니다.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 「신」과 연애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났다. 「엔카운터」 기고 이후 런던 주재 국제 펜 본부로부터 「국제 펜 회보」에 한국 현대문학에 관한 기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나는 그 분야에 관한 한 전문가가 아니었으므로 거절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세계의 문학 안내서에 한국을 소개하는 일이 의미가 큰 것 같아 한 달간의 취재기간을 허락받아 원고를 완성했다. 「문화대사」 피터 현의 「업적」이 또 한 건 더해진 것이다.

○열정적이고 총명한 저널리스트 샐리
히튼 부인 댁에서 기식한 지 보름쯤 되니 스스로 눈치가 보여 「선데이 텔리그라프」의 칼럼니스트 라이오넬 버치의 아파트로 옮겼다. 이 집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파티에서 나는 또 한 아가씨와 눈이 맞게 됐다. 좌익 주간지 편집장을 하다 나처럼 불온한 외국인으로 찍혀 미국에서 추방당한 라이오넬의 옛 친구 시드릭 벨프리지의 열아홉 살된 딸 샐리. 늘씬한 긴 다리와 금발이 매력적이었다.

일주일을 함께 지낸 샐리는 내게 모스크바의 청년 축제에 참가하자고 졸랐다. 나는 갈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샐리는 후에 모스크바를 다녀와서 「모스크바의 방」이란 책을 펴내 영국과 미국의 비평가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65년에는 흑인민권운동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경험을 책으로 알렸으며 이후 「코끼리 인간」의 작가 버나드 포머런스와 잠깐 결혼했다가 인도의 어느 도인 밑에서 공부하면서 취재한 내용을 「공의 꽃들: 어느 암자에 관한 회상」이란 제목으로 책을 냈다. 샐리는 내가 드물게 본 열정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총명한 저널리스트였다.

영국 비자기간 3주가 돼 런던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에게 전화로 시오도라 소재를 파악해보도록 했다. 뉴욕으로 돌아갔다는 친구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리=정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