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관 드로잉 작품을 중심으로 -

 

I

 

남관은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동양화 붓이나 싸인 펜,연필 등으로 그린 얼굴들과 마스크, 인물 군상들이 있고, 비둘기나 기러기 그림과 파리 풍경을 그렸다. 또한 우연한 효과를 실험한 앙포르멜 작업과 도안화된 얼굴 스케치가 있으며, 판화 작품이나 유화의 밑그림처럼 보이는 상형문자 추상화도 보인다. 작은 드로잉 하나하나에 작가는 작품 구상에 관한 단어들과 날짜, 싸인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완결성이 뛰어난 그의 드로잉은 습작이 아닌 완성된 작품처럼 보인다.

 

작품에 관한 기록과 완결성, 이것은 드로잉뿐만 아니라 유화작품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며, 작가의 생명처럼 느껴진다. 1970년 필자는 홍익대학에 재직하셨던 선생님 지도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선생님의 말씀 중에 가장 기억되는 것이 화면 구석구석을 소흘히 하지 말라는 것이 였다. 이것은 단순한 화면 구성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주제를 생각하고 인간의 이미지를 그릴 때, 그것이 존재하는 바탕을 중요시하면서 매사에 꼼꼼히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이 시대에 필요한 예술론이다. 인체를 그리는데 있어서도 부분묘사보다 전체를 중요시하라는 것과 싸인하는 위치까지 작품이라고 생각하라는 것 등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남관의 드로잉은 때로 연습장이나 투박한 종이에 낙서처럼 그려진 습작에서조차 높은 완성도를 느끼게 된다. 순간적 힘의 배출과 완벽한 화면 구성에서 독립된 작은 예술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드로잉은 덧칠하지 않는다는 서체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 꾸밈없는 즉흥적 구성과 선묘의 자유로움은 유화에서 느낄 수 없는 또다른 예술세계이다. 아직도 발표되지 않은 많은 드로잉을 보면서 '남관의 예술'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II

 

남관의 회화적 드로잉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려진 형상들의 이미지 표현이다. 그의 드로잉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난다. 무리진 인간의 군상(群像)과 자연 풍경이 있고, 해와 달, 그리고 별들과 구름, 나무, 산 등 서정적이며 시적(詩的)인 분위기로 그려진다. 드로잉의 배경은 더욱 추상화된 공간이면서 주제가 되는 대상은 사실적 묘사와 함께 상징적 기호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드로잉의 예술세계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바탕이 되는 종이 속으로 스며든 푸른 색과 붉은 색의 얼룩들, 그 위에 순간적 충동으로 그려진 듯한 심상(心象)의 이미지는 경쾌하면서도 깊이를 지닌다. 그의 드로잉은 밝음과 선명함이 생명처럼 느껴지며,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얼룩들은 비록 어둡지만 화면과 밀착되어 시공(時空)을 초월한 내면의 역사처럼 보인다.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조화롭게 평면 위에 형상화하는 남관의 드로잉은 어린아이 보다 더 순수한 자유인의 의지로 해석된다.

 

한편 그의 드로잉은 페인팅과 달리 서술적이며 즉흥성이 중요시된다. 선묘(線描)로 나타나는 인간과 자연 이미지는 주제를 명확히 하면서 즉흥적으로 그려진다. 대부분 인간을 모티브로 단순하게 그려진 형상들은 무거운 구성의 틀에서 벗어나 가볍고 자유로운 표현이다. 즉흥적으로 그려진 인간 군상은 서예처럼 가필이 없는 선묘이다. 단순하며 순간적 결정의 형상들은 화면에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인간 형상은 페인팅보다 더 사실적이며, 즉각적 인상 표현이다. 손과 손을 잡은 군상이나 두팔을 벌린 인간상은 결코 어두운 과거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처럼 드로잉에 나타난 군상의 역동적 움직임 묘사는 페인팅과 달리 희망이 있는 낭만적 성격이 강하다. 작가 자신의 말처럼 캔버스에 그려진 '인간상(人間像)'은 전쟁과 억압 속에서 상처받은 비극적 인간의 형상을 생각하게 하나, 드로잉으로 나타난 '인간 군상'은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축제 분위기인 것이다.

 

이러한 축제 분위기의 드로잉에 배경이 되는 것은 채색되지 않은 여백이나 또는 짙은 푸른색의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여백과 짙은 색의 공간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독특한 해석으로 여백과 색면은 초월적 성격을 갖는 절대적 표면으로 후기 추상회화에서 이야기되는 평면의 순수 공간처럼 보인다.

 

재현적 배경이 아닌 드로잉의 순수한 표면은 마음의 거울처럼 비쳐지는 배경이며, 무한대의 공간 표현이다. 또한 드로잉의 배경이 되는 상형문자와 같은 변형된 사각형의 구축 공간은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배경으로 삼은 이러한 사각형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닫혀진 삶의 현실에서 심리적 탈출구와 같은 상상의 공간인 것이다.

 

자연 풍경처럼 보이는 드로잉의 배경과 상형문자로 구축된 초월적 공간 속에 인간이나 동식물의 이미지 형상이 없다면 그의 드로잉은 완벽한 추상표현주의 회화이다. 드로잉의 배경은 유화와 달리 두터운 마티에르가 없어 감정 노출이 즉흥적으로 일어난다. 겹쳐진 색조의 변화가 많으며, 푸른색과 붉은 자주색, 그리고 흰색의 여백은 색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려는 평면적 추상회화이다. 배경에 등장한 상형문자 형태, 역시 드로잉에서는 순수한 색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평면인 것이다.

 

이러한 바탕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13년간 파리에서 작업하면서 형성된다. 변형된 인상주의 화풍으로 인물을 그렸던 그에게 서구 추상미술은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당시의 프랑스 화단은 비정형(非定形) 회화라는 앙포르멜 미술의 전성기로 파리시기 남관 예술세계 형성에 결정적 관계를 맺는다. 앙포르멜은 두터운 마티에르를 바탕으로 변형된 인간의 형상이나 동양의 붓글씨와 같은 힘있는 터치가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뜨거운 추상화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미국의 액션 페인팅과 달리 제스트(행위성)와 함께 서정적 느낌이 강한 추상화이다.

 

남관의 드로잉 배경은 앙포르멜이라고 하는 비정형의 추상화에서 시작되면서 동시에 추상화에서 탈출하는 출발점이 된다. 경계선과 구속된 틀이 없는 드로잉은 자유로운 표현의 장(場)이다. 때로 표면의 질감과 마티에르 기법이 생략되어 캔버스에서 보여준 추상표현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나 드로잉은 실험적 추상표현의 배경과 함께 구체적 형상이 그려지면서 비대상화(非對象畵)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III

 

그의 드로잉은 자연과 꾸준한 대화를 나누는 인간중심의 휴머니즘 예술이다. 결코 드로잉이 단순한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의미하거나 양식적 특성을 살리는 유형의 습작이 아니다. 더욱이 여가를 위한 유희나 대작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다. 순간적 표현으로 경쾌하면서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하는 살아 숨쉬는 그림이 남관의 드로잉이다.

 

독립된 인간 형상과 군상, 그리고 비들기나 기러기, 상형문자 등 여러 대상의 이미지를 단순한 선묘로 그려낸 드로잉은 작가의 순간적 감정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자연의 이미지와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겹쳐진 사각형들, 푸른 색과 붉은 자주색의 배경, 이것에는 우주의 근원적 힘(氣)이 담겨있다.

 

"나는 아득한 옛날 우주창조 당시로 항상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다. 사람, 동물, 식물, 지구, 불, 물, 공기 등 모두 한꺼번에 어울려져 돌아가던 그 근본 되는 어떤 힘(또는 氣)의 형태를 느끼고 싶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자연이 갖고 있는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 표현보다 형상이 갖는 상징적 우의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드로잉은 단순히 사람이나 비둘기, 기러기 등 이미지 중심의 소재주의 그림과 다르다. 그림의 모티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배경에 깔린 불, 물, 공기의 근원적 힘의 표현이다. 길을 가다가 발에 채이는 이끼낀 돌 위에서도 사람의 얼굴들을 보았다는 작가의 고백은 바로 이끼와 같은 푸른 색조의 얼룩에서도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휴머니즘 예술이며, 그것을 받쳐주기도 하면서 독립된 장르로 꾸준히 이어져 나온 작업이 드로잉이다.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추상화의 선각자로 불리는 남관이 자신은 추상화가가 아니라고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하나의 서구 현대미술사조에 자신을 얽매이기 보다 독자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 예술가의 독백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 증거는 그의 드로잉이다. 그의 많은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추상적인 공간과 함께 인간이 등장하면서 추상과 구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마음속에서 나오며, 형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마음의 표현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의 드로잉에서 자주 나타나는 삶의 숨결이 들리는 인간의 군상, 그리고 하늘을 나르는 기러기 가족, 서정적 추상풍경과 함께 인간적 그리움과 고국을 생각하게 하는 파리 시기의 드로잉은 추상미술의 주류에서 벗어나지만 휴머니즘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결국 남관의 예술세계는 국제적 양식의 앙포르멜 미술보다 더 인간 중심의 삶을 담고자 하였던 것으로 해석되며, 작가는 미(美)의 자유스러운 표현으로 드로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1995. 6.

                                                                                                                                                                   유    재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