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학위 논문


남관(南寬)의 예술세계 연구

 

지도교수 최 병 식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이 두 연

2000년 8월 일




목 차


국문초록 ----------------------------------------------------------------ⅰ


1. 서론 ------------------------------------------------------------------ 1


1) 연구목적 --------------------------------------------------------- 1


2) 연구내용 및 방법 ------------------------------------------------- 2


2. 시대적 배경-한국의 추상미술과 남관 ------------------------------------ 4



3. 남관의 예술세계 시기구분 ---------------------------------------------- 9
1) 시기구분의 근거 -------------------------------------------------- 9


2) 시기구분 -------------------------------------------------------- 11


(1) 모색기 ----------------------------------------------------- 11


가. 사실주의적 탐구시기(일본) ( 1925 ∼ 1945) --------------- 11


나. 반추상적 탐구시기(서울) ( 1945 ∼ 1954 ) ---------------- 16


(2) 심상적 추상표현시기(파리) ( 1955 ∼ 1968 ) ------------------ 17


(3) 기호적 인간상의 추상표현시기(유럽과 서울) ( 1968 ∼ 1990 ) -- 26


4. 남관의 작품세계 분석과 특징 ------------------------------------------ 32


1) 작품세계분석 ---------------------------------------------------- 32


(1) 인물화 ----------------------------------------------------- 32


(2) 단층적 심상추상 -------------------------------------------- 35


(3) 기호적 문자추상 -------------------------------------------- 40


(4) 드로잉 ----------------------------------------------------- 52


2) 남관 예술세계의 특징 ------------------------------------------- 55


(1)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 ------------------------------ 55


(2) 기호화된 인간형상 ------------------------------------------ 58


(3) 꼴라주의 다중적 재질감의 마티에르 -------------------------- 63


(4) 동양적 신비의 색채 ----------------------------------------- 67



5. 남관 예술의 미술사적 위치 -------------------------------------------- 71


6. 결론 ----------------------------------------------------------------- 78


참고문헌 ---------------------------------------------------------------- 81


연 보 ---------------------------------------------------------------- 85


도판목록 ---------------------------------------------------------------- 90


참고도판 ---------------------------------------------------------------- 94
ABSTRACT ----------------------------------------------------------- 107


 


국 문 초 록


이 논문은 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의 한 사람인 남관(1911∼1990)의 예술세계에 관한 연구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분석하여, 독자적 작품세계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특징을 분석하고 미술사적 의의를 연구하였다.


남관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유화를 공부하였으며, 그 당시 동경폭격을 목격하게 된다. 해방후 귀국하여 작품활동 중 또다시 625를 목격하게 되는데 이러한 배경은 후일 남관의 예술적인 원천이 된다. 전쟁후의 혼란기에도 남관의 끊임없는 예술적 탐구는 파리로 이어지며 파리에서 한국적인 앵포르멜로 작품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남관의 작품세계는 모색기에 탁월한 데생 실력과 서양 전통의 구상적 표현 기법을 철저하게 익혀 사실주의적인 표현기법에서 반추상적인 기법을 탐구하였으며, 파리에서는 동양의 정신과 자신의 체험을 서양의 추상기법과 재료를 통해 독자적인 심상적 추상작품세계를 표현하여 국제 화단의 인정을 받게 된다. 1958년 살롱 드 메의 초대를 시작으로 5차례의 초대출품을 하였으며, 1966년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의 대상 수상은 이후 유럽의 유명한 화랑에서의 개인전과 초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1968년 귀국 후에는 파리에서 발견한 기호적 인간상의 문자추상인 자신의 예술 원칙을 일관성 있게 지켜가면서 그 원칙 안에서 한층 심화된 예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남관의 작품세계는 사실주의적 인물화 등의 구상에서 단층적인 심상추상으로 변모를 가지며 또한, 1960년대 말 기호적인 문자추상의 작품을 시작으로 다양한 변모를 추구하여 동양적이며 우주적인 신비 그리고 유희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남관의 작품세계 특징으로는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로 마스크와 상형문자와 같은 기호화된 인간형상, 꼴라주의 다중적인 효과의 독특한 마티에르 그리고 청색을 주조로 한 서정적이며 동양적 신비의 색채로 볼 수 있으며, 동양의 정신과 문화적 전통을 서양화 기법을 통해 현대적인 추상회화로 발전시켰다.


남관은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간상속에 생명의 영원성을 예술로 승화시켜 독자적이며 일관된 예술세계를 표현하였으며, 동양적인 특색은 국제화단에서 그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 한국 현대 미술사상 처음으로 큰 국제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또한 유럽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외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과 초대전으로 베르나드 도리발, 장 쟈크 레베크 등 권위 있는 현대 미술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생을 마치기 전까지 지칠 줄 모르는 작가정신과 예술적 실험의욕은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우리에게 남기는 바가 크다 하겠다.


1. 서론


1) 연구목적


한국의 추상회화는 초기 실험적이고 모색적인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우리의 현대미술을 대변할 정도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추상회화가 보편화되기까지는 초기의 선구자들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대담한 시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중 한사람인 남관은 초기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로 한국의 추상화의 도입과 그 배경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남관이 한국의 추상화에 남긴 예술적 성과는 곧 한국의 현대미술과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관의 예술은 생을 마칠 때까지 많은 변모를 거듭했다. 그 변모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하며 증폭되고 증식해 가는 삶의 체험적 생성의 그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가꾸어 낸 꿈, 흔적, 환영, 묵상 그리고 삐에로에 의해 풍요로워지는 변모이다. 그러나 1960년경 파리 체류 때에 발견한 자기 그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여주며 자기원칙에 충실한 화가였다.


자연적이며 표현적인 화풍에서 출발하여 내면세계를 표현한 심상적 추상화의 독특한 작품으로 세계의 권위를 인정받았던 작가 남관(南寬: 1911-1990)은 1925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인상파로부터, 야수파, 입체파에 이르는 서구의 구상적 표현방법을 익혔으며,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쿠마오카 미술연구소 연구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활동을 하다가 1955년 파리로 건너가 그의 작품세계가 급변하는 하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파리의 추상미술 영향과 전후 전쟁의 체험을 근간으로 자신의 예술적 질료 속에 응축시키고 순화시키는 반추를 거듭한 끝에 독특한 자기 양식을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파리라는 국제 무대에서 살롱 드 메의 초대와, 망통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차지하였고, 1968년 귀국 후에도 서울과 유럽을 오가며 끊임없는 전시회를 가졌다.


파리시절 전쟁체험에 바탕을 둔 작업은 서울 시기에는 자신의 내면세계와 우주적 질서에 그 바탕을 두며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한다. 심상표현과 청색을 주조로 한 세련된 색채조화, 독특한 서양화 기법으로 한국의 다양한 전통적 테마를 자신의 조형언어와 결부시켜 전쟁의 시체 얼굴, 안동의 하회탈, 고대의 유물 내지 전통적인 상형문자를 떠올리게 하는 암시적인 기호물이 등장하고 동양의 전통 색채인 쪽빛(푸른색)을 주로 사용하여 풍부한 감성과 무한한 깊이의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색채의 심리적 효과는 남관 예술의 독특한 아름다움의 요체로서 신비와 영원, 불멸을 상징화한다. 또한 오랜 시간의 경과와 흔적의 시각적 효과를 위해, 얼룩이나 발묵, 드리핑(dripping), 데깔코마니(decalcomanie), 꼴라주, 데꼴라주 또는 네거티브꼴라주 기법을 이용하여 서양의 유화 매체를 동양 전통의 정신 세계로 융합해낸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화가이다.


남관은 일제시대와 625 그리고 파리 진출과 귀국 후의 활동 속에서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정신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생을 마칠때까지 지출 줄 모르는 열정과 예술정신은 한국인 화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 한국을 빛나게 하였지만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남관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배경과 생애 그리고 그의 개인적 체험의 정신적 면모를 밝히고, 작품에서 드러난 형성배경과 영향들이 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남관의 작가정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남관의 회화세계가 보여주는 특징적 면모들을 밝혀 한국 미술을 새롭게 모색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내용 및 방법


남관의 일본 유학 당시의 우리나라는 완고한 봉건적 사고방식으로 예술이라는 것을 천박한 것으로 배격하고 있었다. 남관은 그러한 상황에도 미술공부를 위해 과감히 일본으로, 파리로 건너가 새로운 경지의 미술과 현대적인 서구미술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남관은 일본의 패전과 625를 겪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예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앞의 두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초기의 작품이 거의 분실되어진다. 그러므로 전 생애에 걸친 남관의 예술세계를 고찰하고자 할 때 일본유학시절의 초기작품인 인물화 위주의 사실적인 그림과 해방 후에 파리로 가기 전까지의 구상과 반추상의 작품은 남아있는 몇작품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과 어려움이 있다.


본 논문의 본론은 전체 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첫째장인 2장에는 한국의 추상미술의 도입과 전개를 살펴봄으로써 남관의 예술형성의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였다.


3장은 그의 예술세계를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연구하였는데, 남관의 작가 활동의 배경과 다양하게 증폭되는 회화 세계의 양상을 감안할 때, 그의 예술세계 전개과정을 단순히 연대적으로 구분하거나 구획 짓는다는 것은 싶지 않다. 그러나 편의상 예술세계의 변모과정을 시기별로 구별하여 살펴보면, 모색기로 일본유학시절 사실적 표현시기와 귀국 후의 반추상적 표현시기, 파리체류시절 심상적 추상표현시기, 유럽과 서울에서의 기호적 인간상의 추상표현시기로 구별됨을 볼 수 있다.


4장은 작품세계의 분석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작품분석에는 초기 일본유학시절과 해방 후 귀국 작품들인 인물화 위주의 서정주의적 작품들로 남관의 예술 형성과정을 분석하였고, 다음으로 파리시절부터 동양의 정신을 독특한 서양화법으로 표현하여 독자적 작품세계를 표현한 단층적 심상추상과 기호적 문자추상의 작품을 분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남관의 실험작인 드로잉 작품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작품의 특징에는 이러한 남관 예술의 독특한 조형기법이 탄생하기까지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정신적 면모를 밝히고, 어떻게 표현되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 기호화된 인간형상, 꼴라주의 다중적인 마티에르 그리고 동양적 신비의 색채로 요약되어진다.


5장에서는 귀국이후에도 서울과 유럽을 오가며 국제화단에서의 활동과 전시평을 중심으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예술을 탐구한 남관의 미술사적 위치를 살펴보았다.


2. 시대적 배경-한국의 추상미술과 남관


20C 미술에서 등장한 추상회화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후 칸딘스키, 들로네, 말레비치 그리고 몬드리안 등에 창안되었으며, 외부세계의 재현을 거부하고 순수한 주관적 색채와 화면 구성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있다. 또한 전후의 새로운 각광아래 질적양적으로 발전하여 단 하나의 표현양식으로만 그치지 않고 기하학적 추상과 서정적 추상의 이름으로 다양한 양식의 앵포르멜, 액션페인팅, 추상표현주의 등이 동시에 등장하여 많은 유파와 추종자들을 낳게 되었다.


입체파, 야수파, 미래파 등 추상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급격하게 대두될 무렵인 1910년대의 한국에서는 서구의 회화기법이 도입되기 시작하였지만 일제통치 하에 일본을 통한 시작으로 동경 유학을 통해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화가들과 해방 이후 서구에 유학을 하고 정통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작가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정착하게 된 것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나타난 추상화의 등장은 1910년 고희동을 비롯하여 몇몇 동경 유학생들에게서 시작된 구상화보다 30여 년이 지난 1940년 전후 일본의 추상회화 단체와 같이 활동하였던 한국 화가들에 의해 나타난다.


추상회화는 이미 김환기, 유영국 등 선구적인 작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탐구되고 있었다. 현대미술을 지향하고자 하는 이들은 1934년 <아방가르드 아카데미>를 조직하고 1948년 <신사실파> 운동을 주도하는 등 추상미술의 주체적 수용을 모색했다. 그러나 독창적인 추상회화 운동이 아닌 구상과 추상의 절충적 형식이 강하고 인물과 자연의 이미지 묘사 작업이 주류였으며, 이들의 소위 "서정적 추상" 형식은 주로 우리의 자연을 선, 면 등의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환원하는 방법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는 유화계 역시 작가들의 이념적 대립에 따른 화단 내부의 갈등과 생활환경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불안했던 시기였으며, 남북 작가들의 이동현상으로 월남 및 월북 미술가를 탄생시켰다. 또한 <선전>이라는 기존 활동무대의 공백을 1949년에 출범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가 채우면서 국내 작가들의 구상회화의 경우 <국전>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한편, 미술학교가 생기고, UN군이 진주하면서 국제적인 미술동향이 소개된다.


한국의 근대미술이 서유럽과 미국 쪽의 새로운 현대 미술 조류 및 그에 잇따른 변혁적 양상과 직접, 간접의 연관성을 가지며 국제적 추세를 포용하고 소화한 현대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 배경은 3년에 걸친 참담한 625전쟁이 1953년 7월에 휴전된 뒤로 각 방면의 구미(歐美) 선진문화 정보와 신선한 자극이 여러 경로로 수용되면서부터 국제적, 현대미술동향을 소화하여 각기 작업의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활발히 전개된 한국 추상회화는 자연과 인간의 체험을 추상화하여 그려지는 앵포르멜(Informal) 계통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정적 느낌의 자연 풍경과 역사적 유물과 시간의 흐름을 두터운 마티에르(Matiere)와 무거운 색채로 표현한다. 당시 대표적 앵포르멜(Informel) 추상화가들로 김환기, 남관, 이응로, 유영국, 유경채, 김영주, 하인두, 권옥연을 비롯하여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김창렬, 윤명로 등으로 이러한 경향에 참여한다.


전후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바 있는 구상과 추상의 대립은, 60년대 초반 우리 화단에서도 재연되었다.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이 대립은 전후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한국에서 구상추상의 대립이 6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보아서 추상의 급격한 대두와 상응되고 있다. 추상계열의 급속한 세력화를 견제하기 위한 구상계열의 결속은 한차례 치열한 논쟁의 소용돌이를 몰아왔으며, 이와 같은 현상은 시기와 지역을 달리하는 세계적인 추세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피해지였던 유럽은 인간성의 말살과 인간의 잔임함을 목격하고 진보에 대한 불신과 기존 가치관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는데, 미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기존의 회화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미술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적 혼돈은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과 비슷했고, 화가들은 이러한 갈등이 표현된 그들의 화면에 공감을 하였을 것이다. 국내에서 일어났던 추상미술운동과 함께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였던 우리나라의 미술가들 역시 뜨거운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아 국내외를 막론하였다. 또한 '국전'이라는 부패한 화단에 대한 저항의식과 함께 뜨거운 추상은 미술계의 전체를 뒤덮는 변혁의 대명사가 되어갔다.


비정형의 추상미술이 수용전개된 것은 1957, 58년 무렵이었지만 그것이 현대미술의 주류로서 등장한 것이 60년, 61년 무렵으로 62, 63년경에 이르면서 포화상태가 짙어져 갔다. 이 점진적인 포화상태가 거의 추상미술이 주류를 형성하자마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재빠른 아류(亞流)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범람하게 되었다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누구나가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특정 경향에 자신을 의탁할 수 있을 만큼, 현대작가로서의 명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비정형이 이미 비정형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형식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의 추상회화는 앵포르멜 이후 모노크롬(Monochrome)이 주된 성격을 이루면서 동시에 기하학적 추상이나 옵아트(Op Art)등 다양한 표현의 추상 경향 등이 그룹과 협회를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그 뒤 앵포르멜과 기하학적 추상 등 다양한 표현의 추상화가 제작되면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인상적인 현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획일적이고 관념적인 미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다양화경향이다. 중반에는 모노크롬 추상화, 기하학적 추상, 실험미술, 미니멀리즘 곧 단색조의 평면주의를 일컫는 개념적 성격의 추상회화가 등장한다. 서구양식의 여과 없는 한국적 미의식에 의해 부분적으로 극복되었고 한지작업이 성과물로 나타났다.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추상회화가 우리 화단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단절된 추상미술의 현실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7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한국미술계는 이른바 평면주의와 탈이미지즘이 주류를 이루면서 물성(物性)과 신체성의 문제에 몰두하게 된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의 추상화는 앵포르멜 경향의 서정적 추상과 모노크롬 추상화인 개념적 추상이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면서 새로운 매체 활용에 의한 복합적 성격의 추상작품이 주목된다. 1980년대 이후 국제적 성격의 신표현주의 영향으로 회화의 주제가 살아나고 이미지의 부활이 강조되면서 한국추상화 입지도 미약해진다. 그러나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추상회화는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후기 산업사회로의 구조적인 변화, 탈냉전의 분위기, 그리고 민주화의 이행이라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함께 미술계 역시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추상화를 중심으로 도입과 전개를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남관은 해외활동을 주로 하여 국내에서의 추상회화의 전개와는 많은 연계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앵포르멜의 수렴을 통한 한국정서의 내면화 작업등은 한국 추상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앞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현대 미술에 나타난 추상화의 흐름은 자생적인 면이 부족하다 하여도 나름대로 추상회화의 많은 갈등과 해소,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실험정신, 수난의 시대적 역경 속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남관의 작품에 나타나는 추상성은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함을 볼 수 있다. 2차대전과 625동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정신적 충격과 불안을 체험하였고 파리초기의 고통을 겪으면서 동시대의 상황인 전후 새롭게 형성된 국제화단의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아 실험정신의 산물인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전후의 사회적 상황과 세계적인 추상미술의 배경은 남관을 구상에서 추상적인 표현으로의 변화를 가지게 하였으며, 그 추상적 회화는 독자적 개인양식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전쟁의 체험에서 온 심상적 추상과 기호적 문자추상이 그것이다.


파리에서의 귀국이후 남관은 다양한 기호적 추상작품을 제작하였다. 당시 한국의 추상회화는 앵포르멜 이후 모노크롬, 기하학적 추상이나 옵아트(Op Art)등 다양한 표현의 추상화가 제작되면서 1970년대에 접어들어 획일적이고 관념적인 미술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와 단절된 추상미술의 현실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볼 수 있다. 정체성의 논의가 ' 형식이나 소재에 앞서서 의식구조의 올바른 전승을 전재로 문화를 인지하는 힘을 발휘할 때 큰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다. 남관의 경우 대부분 해외에서 활동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왔고 이 그리움은 한국의 전통에 대한 근원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서는 동양적이며 우주적인 세계를 전후의 체험과 같이한 실존적 철학의 인간상 모색과 함께 기호적이며 동양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것은 남관이라는 예술가의 성장배경이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색채가 진한 안동에서 전통 문화의 깊이 있는 성장 배경으로 한국의 다양한 전통예술을 테마로 이용할 수 있도록 형성해 주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전통의 서예를 떠올리는 상형문자와 같은 기호와 한국의 탈, 신라시대의 금관 그리고 샤마니즘적 부적, 장승과 같은 형상을 한 조형언어는 '본디 존재하는 참모습' 이라는 정체성의 정의에 부합된다 하겠다. 다시 말하면 전통이라는 모체를 중심으로 한 변속적이면서도 새롭게 구현된 참존재의 실체를 형식, 내용, 소재의 주체로 모든 것을 표현하였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속한 한국의 정체성은 남관의 정체성 또한 확인시켜주었으며, 오늘날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예술세계라 하겠다.


 


3. 남관의 예술세계 시기구분


1) 시기구분의 근거


남관 예술세계의 활동배경과 다양하게 변화되는 작품경향을 단순히 연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싶지 않다. 남관의 예술세계는 양식상으로 구분하면 전기의 구상회화와 후기의 추상회화로 대별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남관의 예술세계가 전반적으로 국제적인 성과를 거둔 파리에서 발견한 추상적 기법의 예술세계이다. 이 추상적 기법은 일관되기는 하나 끊임없는 탐구와 변모를 가져왔다. 그것은 파리 초기의 반추상에서 심상추상, 그리고 말기의 문자추상으로의 변모이다. 그러므로 남관의 예술세계를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모색기로 일본유학시절 사실적 표현시기와 귀국후의 반추상적 표현시기, 두번째로 파리체류시절 심상적 추상표현시기, 마지막으로 귀국후의 유럽과 서울에서의 기호적 인간상의 추상표현시기이다.


남관의 모색기는 일본유학시절 인물화 위주의 사실주의적 탐구시기와 귀국 후의 반추상적 탐구시기로 1935년부터 1954년까지이다. 모색의 기간으로서는 비교적 길다고 할 수 있지만 일제시대와 625동란의 혼란을 겪었으며 이 기간동안 모방과 탐구의 새로운 실험으로 쌓인 경력과 실력은 그의 예술적 기반이 되어 현대적 조형언어를 창조하게 된다.


남관의 예술세계는 초기의 구상에서 반추상으로, 다시 추상적 작품경향의 변모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모과정을 통해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추상기법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하였다. 따라서 초기의 사실적 탐구시기와 반추상의 탐구시기를 모색기로 규정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예술의 의지를 보여준 남관은 앞의 두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초기의 작품이 거의 분실되어 일본유학시절의 초기작품인 인물화 위주의 사실적인 경향의 남아있는 몇 작품만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심상적 추상표현시기에 남관은 파리 초기 반추상의 과도기를 보이나 미술관, 전시회를 통해 파리의 다양한 추상미술을 직접 경험하여 작업방향을 한국적 정신과 서양의 재료와 기법을 이용한 추상방법을 표현하게 된다. 그것은 2차대전의 동시대적인 불안과 절망을 체험한 남관은 오랜 인간역사의 흔적에 대한 회상과 한국에 대한 영상을 독특한 서양화법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동양적인 특성의 예술로 인정받아 1958부터 6차례의 살롱 드 메 초대와 1966년 망통비엔날레의 대상을 수상하여 국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며, 전쟁후의 황폐한 고국에 대한 심정을 담은 작품은 파리 국립 현대미술관 등에 영구 소장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기호적 인간상의 추상표현시기의 남관은 귀국 후에도 서울과 유럽의 오가며 기호적 문자추상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것은 1960년도에 이미 시도하였던 마스크와 상형문자로 표현된 다양한 인간형태이며, 이 시기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초기의 추상적 기법에 일관하면서도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끊임없는 실험과 탐구의 결과이며, 우주의 새로운 질서의 표현과 한국의 전통적인 형태를 자신의 표현양식과 조화되어 형상화함으로써 한국조형예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이며 국제적인 예술로 승화시킨 시기이다.


이상으로 남관의 예술세계 시기구분을 나누어 보았다. 남관의 예술세계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이러한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은 색채의 변화로 인해 말년의 작품경향은 한층 다채로운 색채와 유희적이며 풍요로운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2) 시기구분


(1) 모색기


가. 사실주의적 표현시기(일본) (1935 ∼ 1945)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합방된 이듬해인 1911년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에서 출생한 남관은 안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관이 화가로서의 삶이 예견되는 것은 초등학교시절 일본인 담임선생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으로 화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소년기를 채 지나기도 전에 남관은 부모님을 졸라 도일(渡日)한다. 14세때인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와세다중학교를 다닌 남관은 중학 5학년때 당시 동경(東京)이 지니고 있었던 미술적 환경에 영향을 받아 인상파(印象派) 「고호」 화집(畵集)과 전기(傳記)를 보면서 상당히 아름답게 느껴져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도쿄의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후기 인상파, 특히 세잔의 분석적인 미술정신에 심취했던 남관은 1935년에 본과 졸업에 이어 2년 과정의 연구과 수업을 받아 탁월한 데생 실력과 구성력을 갖게 된다. 1935년의 일본 미술계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절충적 아카데미즘을 시작으로, 서구미술을 도입한지 어언 반세기를 맞고 있었다. 남관이 졸업한 태평양미술학교는 1929년 사립 미술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45년 일제 패전시기에 소멸되기까지 한국유학생은 적지 않았다. 태평양미술학교는 관학인 동경미술학교와 쌍벽을 이루며 일본 전위미술의 정초(定礎)을 이루는 화가들을 배출했다. 국내작가로는 일찍이 야수파와 입체파풍을 혼합한 듯한 개성적 표현세계를 보였던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구본웅을 들 수 있다. 구본웅은 남관의 일년선배로써 졸업함을 볼 때 당시 이 학교의 수업분위기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교분위기와 미술상황은 남관이 현대미술작가로 출발하는데 하나의 배경을 이루어 주었을 것이다.


태평양미술학교에서 2년 과정의 연구과 수업을 마치고 데생실력과 구성력을 인정받아 1939∼1944년 동안 인상파적인 색조의 사실적인 유화가로 알려진 쿠마오카 요시히코(1944년 사망)가 개설하고 있던 도쿄의 쿠마오카 미술연구소(態岡美術硏究所)에서 회화연구를 계속 하면서 작품활동을 전개하여 당시 권위적인 관전이었던 일본제전, 문전 등에 수 차례 입선을 하였다. 쿠마오카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또한 동광회(東光會), 국화회(國畵會), 문전(文展) 등에 참가하는가 하면, 1944년 동광회의 회원으로 추천되었고, 그의 재능과 수학의 성과로 1942년 후나오까상(船岡賞), 1943년 미쯔이상(三井賞) 등을 수상한다. 남관의 당시 화풍은 풍경화 보다 인물화 위주의 사실적인 그림으로 인물을 주제로 한 생활이 그의 화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의 작품은 대부분 분실되어 남관의 초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1943년 <검도복의 소년>(도판1)과 1946년 <파이프가 있는 정물(靜物)>(도판2)에서 당시 세잔느의 작품에 경도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상을 생략하고, 색면구성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물감을 붙이는데 있어 반투명적 효과를 자아내는 것은 세잔느의 수채화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화면이 지닌 투명성은 장차 그의 작품세계에 일관된 특성으로 나타난다.


남관은 1945년 일제의 패전과 조국의 해방으로 귀국한다. 졸업을 하고 그곳에서 해방 전까지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는 사실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유학생활은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일본적 감성을 체득하게 하였지만, 반면 그의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한국적 근원에 대한 의식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즉 후천적으로 획득된 일본적 감성과 1930년 중반의 일본미술계의 전위적 분위기, 그리고 태평양미술학교에서의 수학은 작가로서의 그의 삶에 주요한 형성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의 성격과 작품 경향을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나. 반추상적 표현시기(서울) ( 1945 ∼ 1954 )


1945년 2차대전의 일본패전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고 다음해 귀국한 남관은 식민상황에서 출생하여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다 할 10대에 일본에서 유학하여 30대의 중반을 넘어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서울에 정착한 남관은 일본에서 자연주의적이며 표현적인 특성을 예민한 감성의 수법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의 혼란한 사회상황 속에서 꾸준히 작품활동에 정진하였다. 국내 미술계에서 그의 작가적 비중은 당장 존중되었고, 1948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가 조선종합미술전을 주관할 때에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만큼 그에 대한 평가가 이미 엄연하게 굳혀져 있었다. 그 해 8월에는 좌익 미술동맹에서 이탈하였던 이쾌대, 이인성, 이규선 등과 순수 미술 지향의 조선미술문화협회 창립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1949년에 첫 국전(國展)이 열릴 때에는 서양화부 추천작가로서 <해바라기>를 출품하는 등 남관의 미술계 위치는 확고하게 부각되었다.


남관은 어수선한 정국과 미술계의 좌우익 대립의 와중에서도 지속적으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보였으며, 1948부터 1951년까지 숙명여대와 홍익대 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0년 남관은 김병기(金秉騏), 김영주(金永周), 김환기(金煥基), 박고석(朴古石), 유영국(劉永國), 이봉상(李鳳商) 등과 「50년 미술협회」를 발족시키지만 다음해 전란으로 무산된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 유일한 에꼴의 참여였다. 이러한 정신이 파리의 유학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남관의 당시 예술세계는 1947년 개인전에 대한 배운성(裵雲成)의 다음과 같은 전평(展評)으로 그의 작가적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남관의 개전(個展)은, 작년 10월 동화백화점에서 개최된 제1회전을 보았을 때부터 느낀 인상이지만, 종래(從來)의 다른 어떤 전람회에서보다 이채(異彩)를 보여준 건실(健實)하고 유망(有望)한 우리 나라 서양화로 많은 기대를 갖게 하였다. 그 작품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진실하고 명랑(明朗)하며 감각적(感覺的)인 작가인가를 알 수가 있다. … 남씨의 작품은 물체를 보는데 솔직하고 색채를 쓰는 데 명랑하고 감각적이며, 구성이 풍부한 좋은 의미의 유화이다. <석경(夕景)>, <촌(村)장날>과 같은 것은 구성과 색조가 좋았고 명랑하였으며, <새벽열차>는 차중(車中) 분위기를 솔직히 관찰하면서 회화적 색조에 성공하였고, 특히 <휴양(休養)>의 침착하고 고아(高雅)한 녹색배경의 의자에 앉힌 노인상은 대가의 필치를 발휘하였다.


앞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몇 작품을 통해 받은 작품경향은 리얼리즘의 아닌 대상을 감각적으로 해석하려는 서정적 분위기로 1951년에 일본에서 제작한 <고향의 노인들>(도판3), <농부가족>(도판4) 등에서도 그 무렵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의 개인전은 6월 24일에 끝이 났으며 바로 그 다음날 625동란이 시작되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흑석동 화실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2차대전 막바지에 있은 심한 동경폭격으로 옆에 있던 친지들이 폭사하는 것을 보았던 그는 또다시 전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625 전쟁은 남관의 예술 궤도에 새로운 진로를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피난길에 보았던 벌판에 쓰러진 병사들의 모습, 잘려진 팔이나 다리,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참상의 경험과 14후퇴 시 종군 화가단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하면서 갖가지 주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천태만상의 인간상은 후일 그의 작품에 표현되는 마스크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피난지 부산에서도 「전시 미술전」,「31 기념미술관」을 통해 작가적 활동과 탐구를 해오던 남관은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전쟁이라는 비극적 체험이 각인 되어 후일 그의 예술적 근간을 이루게 된다.


남관은 피난지 부산에서 선원들이 가져와서 파는 일본신문인 마이니치신문사(每日新聞社)주최의 국제전에 파리 화단을 소개하는 기사를 보고 당시 외무부장관을 하던 변영태(卞榮泰)와 후꾸시마 시게따로(福島繁太)의 도움으로 1952년 재차 도일(渡日)한다. 동경도(東京都)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일본국제미술전(日本國際美術展)에 참가한 프랑스, 미국 등 6개국 작품을 관람한 남관은 새로운 창작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국제 미술사조의 새롭고 격동적인 양상은 남관에게 충격적 자극을 주었다. 당시의 충격을 시인 이흥우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특히 국제전(도쿄 비엔날레)에서 술라주, 마네시에, 폴리아코프, 피카소 등 현대의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흥분할 만큼 자극을 받았다.


또한 아르퉁 및 피카소의 작품 등 거의가 추상작품인 파리 살롱 드 메의 전시를 관람한 남관은 파리에 가야겠다는 결심과 국제 미술계로의 도전을 작심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53년 동경(東京)의 포름화랑에서 개인전을 한 남관은 포름화랑주인인 후꾸시마 시게따로(福島繁太郞)에게 다시 한번 남관의 프랑스유학을 주선해 주게 된다. 마침 부인이 파리에 취재 차 있던 중이라 파리에 있는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멜」의 입학증을 보내준 것이다.


귀국 후 1954년 10월에 서울 미도파백화점화랑에서의 도불(渡佛)기념전에 출품된 작품은 카탈로그에 의하면 총 67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이 기념전은 남관으로서는 그 동안의 작가 생활의 총결산이자 동시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예견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작품의 경향은 사실적인 정물, 풍경화, 누드로부터 후기입체파의 콤포지션을 추구한 작품으로 이후 남관의 추상세계를 예감케 하는 서정적 추상 작품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1952년 도쿄에서의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반영한 반추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 추상은 오늘날 우리가 뜻하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추상이라기보다는 마르셀 브리옹이 말하는 이른바 '추상화된 회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남관의 국제적 추상주의 변신이 그 시점에서 이미 방향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도불 기념전으로 비용을 마련한 남관은 1954년 11월에 한국을 떠나 잠시 일본에 체류한 다음 파리로 출국을 하게 된다.


(2) 심상적 추상표현시기(파리) ( 1955 ∼ 1968 )


해외정보에 어둡고 외국에 나가서 외국 화가들과 활동하던 화가가 거의 없던 당시 1954년 연말에 일본을 거쳐 배편으로 떠났던 남관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55년 2월이었다. 상상했던 파리의 온갖 미술형태에 직접 접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서구의 미술, 특히 일본식 아카데미즘에 불만을 가졌던 남관의 당시 심정은 한 10년전에 왔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콩코드 광장 근처의 인상파 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서, 일본에서 공부한 것이 모두 허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서양화라고 가르친 것은 모두 기교뿐이었습니다. 오카다(岡田三郞助)나 구로다(黑田淸輝)는 정신적인 맥락을 뒷전으로 하고 기교만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흔살이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추상회화의 전성시대에 파리에 간 남관은 추상운동이 후기 인상파와 입체파의 작가들이 해온 일과 밀접한 관련을 파리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남관은, 자신의 예술을 사회적 교섭의 형식으로 공개하는 어떤 방법도 모르고 있었으며, 독학으로 익힌 프랑스어 지식은 당장엔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을 미술 여론의 대상으로 환기시켜줄 만한 문화 외교의 전문직종이 별도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껴야만 했으며,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근대미술의 중심지 파리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시공간(視空間) 속의 허공이 있다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파리에는 대략 이십명 정도의 한국인이 있었으며, 예술가로는 이성자(51년), 김흥수(55년), 김중업(54년), 손동진(56년) 등이 나름대로의 예술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한국의 외교 대표부로 외교연락사무소는 레가숑 드 코레가 라 스파유 거리의 건물 이층 한쪽을 빌려, 태극기를 달아놓고 있었을 뿐이다. 조원석이라는 사람이 공사대리로 있었으며 모든 외교업무를 혼자서 처리하였다.


남관의 아틀리에는 프랑스 근대 미술의 요람지이자 에콜 드 파리의 노스탤지어가 젖어 있는 몽파르나스의 한 구석으로 에콜 드 파리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드나들던 카페 도톤느에서 가까운 괴테거리의 막다른 골목 안에 있었다. 골목의 담 너머로 몽파르나스 묘지가 있어, 보들레르(Ch. Baudelaire)가 잠들어 있는 유서 깊은 정적이 배어 흐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틀리에는 낡은 3급 주택건물의 지하실이었다. 바닥에는 늘 물이 고여 있었고, 두서너 개의 전등은 밤낮 없이 켜야만 했으며, 이러한 빛이 벽면의 습기를 축축하게 반사하였다. 남관은 바닥에 벽돌을 고이고 그 위에 캔버스를 벽에 기대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모딜리아니들처럼 카페 도톤느의 단골은 아니었으며, 2차세계대전 전야의 유럽의 운명에 대해 열띤 언설(言說)을 주고받던 20세기초의 로맨틱한 화가들과는 본성적으로 거리가 있는 동양의 화가였다.


남관은 카페 도톤느 건너편에 있는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엘」에 수업료를 내고 기초데생부터 시작했지만 간혹 모습을 보이곤 했다. 1955년 <습작>(도판6), <파리에서>(도판7)는 이 당시의 작품이다. 그랑드 쇼미엘은 아카데미 쥬리앙과 더불어 20세기초 파리로 모여든 예술적 코스모폴리탄들의 본거지였으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40대초 파리에 정착한 남관은 어떤 면에서도 학생 신분으로서의 미술학도는 아니었다. 정규과정으로서의 고전적 학습을 이미 일본에서 습득한 그는 직업화가였으며, 자기 고유의 미술관을 불혹의 연륜에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몇 개월간에는 전시회 관람과 집에서 작품제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파리 정착 후 첫 활동은 1955년 4월 쁘띠 빨레에서 열린「재불 외국 화가전」이다. 이것이 남관의 작품이 파리에서 일반 관중에게 공개되는 첫 번째 계기가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남관은 「친일파」혹은「반민족」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매도당하여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남관은 청춘을 보낸 일본의 미술가들과 접촉했는데, 19세기말부터 많은 화가들을 진출시킨 일본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선배였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정서적 친밀감과 기대감이, 추상적인 민족적 인과를 우선으로 하는 현실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통해, 파리의 쁘띠 빨레(Petit Palais)에서 관례적으로 「재불 외국 화가전」이 개최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출품하게 된 것이 자국으로부터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다음 글은 《공간》지의 〈원근기〉에서 당시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나는 너무나도 이해하기 곤란한 기사라 누가 모략을 해서 만든 기사라는 것을 짐작했다. … 이 전람회에 출품하게된 경유를 말하면 벨기움국과 프랑스의 문화협회 주최로 파리시가 관리하는 미술관 쁘띠 빨레에서 재불외국인작가들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재불공관을 통해서 재불한국작가의 출품을 요청해왔다. 그래서 당시 김흥수씨와 필자 두 사람밖에는 없었음으로 자연히 우리 두 사람이 한국작가로서 한국공관을 통해서 김흥수는 <함흥풍경>을, 나는 <두노인>을 출품한 것이었다. … 내가 하고자했던 한국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독립적인 일, 나아가서는 국제성을 지닌 작품을 하려든 확신조차 희미해졌다. … 내가 단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것을 나를 보고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나는 정신적인 타격을 한층 더 심하게 받았던 것 같았다.


정신적인 타격으로 한동안 작업의욕을 잃게 되지만 작업하는 동안은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에 남관은 다시 작업제작에만 전념한다.


남관은 「재불 외국인 작가전」에 출품으로 외국인 화가, 곧 에콜 드 파리의 한 구성원이 된다. 출품한 <두노인(1955)>(도판5)은 25호 크기로, 폐허된 땅에 복덕방 노인 같은 두 노인이 앉아있는 조금은 입체주의적인 그림으로 58년 살롱 드 메에 초대된 계기의 작품이다. 이어 1956년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현대 국제 조형 예술전」엔 색동의 한국 의상을 입은 여인의 전통적인 춤을 주제로 다룬 <콤포지션(1955)>(도판8)을 출품한다. 파리 체재 첫 작품이랄 수 있는 <두 노인>(도판5)의 그림은 그의 서울 시대의 경향을 그대로 지속한 듯하나 입체파 풍의 면 분할이 다소 눈에 뜨인다. 그러나 춤을 다룬 작품, 그러니까 파리 체재 2년이 되는 해의 작품에 와선 구체적인 형상이 비형상적(非形相的)으로 지워지면서 색채와 형태의 유기적인 해석이 다분히 떠오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정적(靜的)인 구도와 견고한 형태는 강렬한 운필(運筆)의 자동(自動)에 의해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와 같은 표현적인 추세에로의 이동은 1950년대 전반을 통해 파리를 풍미하였던 추상표현주의 영향의 한 증거로 확인할 수 있다.


파리 정착 초기의 남관의 변모는 당시 파리에 범람하던 앵포르멜(比定形) 미술의 열풍에 동조하려고 한 작품 태도로 시도되고 있었음이 1955년 작품에서 나타나는데, 짙은 검은색이 지배하는 속에 붉고 흰빛의 색상이 스며들어 변화의 분위기를 조성한 완전 추상표현의 <밤(파리)>(도판9)과 자유로운 변용으로 어느 건물의 구조적 실체미를 평면적으로 전개시킨 <파리야경>(도판10)등이 그것이다.


초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아직도 대상(對象)을 어느 정도 잠재하고 있는 과도기적 양식이었지만 구체적인 형상을 지우고 자동적인 기술방법에 의한 강렬한 운필(運筆)과 유기적 색의 구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50년대 세계화단인 추상표현운동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남관은 그 양식을 잘 소화해 가고 있었다.


40년대 후반에서 특히 50년대초에 걸쳐 한 때 추상회화의 전성시대가 있었지요. 추상이라고 해서 화구(그림물감)를 발로 짓이겨 놓는다든가, 손바닥에 화구를 칠해 캔버스에 탁탁 찍어 여러 개의 자국을 낸다든가, 앵포르멜이라고 해서 페인트를 통째로 바닥(캔버스)에 퍼붓는 것 같은, 이런 것도 통했어요.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그런 짓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정리는 됐다고 해도 앵포르멜이 역시 범람할 때였지요.


이 말 속에는 남관이 파리에 갔던 초기의 그 앵포르멜과 필연적 연관성이 시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그 시기의 작품 자체가 말해준다. 파리 유학에 대한 동경은 당시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파리에 많은 전시회 관람으로 한국에 있는 신문사에 유럽화단의 경향을 전해주기도 하였던 남관은 클레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충격적 계시로 다가오게 된다. 다음은 당시 그의 유학을 통해 받는 영향들을 밝히고 또 그 작가로서의 자세를 폴 클랭의 전시평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1955년 파리에 와서 정착하였다. 그것은 서양미술을 직접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 나는 파리의 미술관들을 돌아보고 런던, 독일, 스페인 등지를 여행했다. 세잔느의 후기작품에 감명을 받았고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클레의 발견은 하나의 충격적 계시였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것을 단순히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인스피레이션의 원천으로 삼고 또 하나의 윤리적, 지적, 정신적 변혁의 계기로 삼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남관은 파리에 미술학원 그랑 드 쇼미에르를 마칠 무렵 미술에 있어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색을 시도로 서양의 것을 단순히 카피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인스피페이션을 원천으로서 동양적 속성을 받아들인 앵포르멜을 자연스럽게 채용하였다. 초기에는 미셀 타미에의 앵포르멜이론에 경도되기도 하였지만 어떤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구속되기보다 창조적 상상력의 자발성에 모든 것을 맡기려는 그의 체질로 돌아가 애초의 유학 시 다짐했던 대로 앵포르멜을 하나의 변혁의 계기로 삼게된 것이다.


이 무렵 한국에서 부쳐주기로 한 송금이 중단되어 미술 재료는 물론 식사도 제대로 못할 곤궁에 빠진다. 노동자 아파트에 낮에도 전기를 켜놓고 우유와 빵만을 먹으면서 남관의 예술도 이러한 시련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아래의 인용은 남관의 시련과 당시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무리 고생이 심해도 파리에서 죽어도 안 돌아간다는 결심을 하고 몽파르나스에 작은 방(뒤가 바로 공동묘지)을 얻어서 그림을 그렸어요. 물감도 돈이 없으니까, 싸구려를 사 종이에도 그리고, 또 밤에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가서 말을 배워야지요, 그리고 일요일마다 루브르와 파리 현대미술관을 가서 봅니다. 일요일은 무료니까요. 지하철을 탈 16센트가 없어서 걸어서(루브르까지 약3.5㎞, 현대미술관 4.5㎞) 갑니다. …특히 고전과 인상파 그림들을 많이 보았지요. 그러나 나이도 먹고 어느 정도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 자신의 작품에 급격한 변화 같은 것은 볼 수가 없지요.


이 같은 내용은《현대미술》의 인터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유교사상에 젖은 동양인으로서 당장 굶으면서도 상업화를 그릴 수는 없었으니 경제적인 사정이야 정말 딱했죠. 그렇지만 이역만리를 떠나 파리에까지 오게된 동기를 생각해 보면 새로운 투지가 생겼습니다. 밤낮 없이 죽어라고 작품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작품에 변화가 왔습니다. 나는 나 자신 미술운동을 할 머리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남관의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외로움 속에 파리와의 대결의지를 불태우며 한국에서 간 동양인 예술가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려 들었던 남관은 미술관, 전시회를 통해 파리의 다양한 추상미술을 직접 경험하여 작업방향을 정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적 내지 동양적인 정신을 서양의 견고한 재료를 표현하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추상적 방법이었다. 《공간》지의 〈원근기>의 내용을 보면,


…내가 동양인이니 만큼 나의 체험은 내가 살아온 동양을 기반으로 나온 것이라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동양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라야 한다. 어떤 방법이든 서구인들과는 다른 창조의 세계를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우리(한국)의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온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잘못하면 민속적인 포름을 느끼게 하는 병적인 것을 초래하기 쉽다. 우리나라에서 내가 체험한 모든 사건들은 나의 창작을 위한 motive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통속적인 값싼 forme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이 작가의 무형의 마음을 통해서 한 평면위에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 것인가?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방법으로는 한층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나의 일의 방향은 동양적 내지 한국적인 정신을 동양의 그림 재료보다 견고한 그들의 과학적인 재료를 빌려서 표현할 것으로 정했다.…우리에게 있어서는 국제성을 띄운 작품이란 구미적인 것이 아니고 민족정신이 바탕이 된 독창적인 정신과 비형식적인 표현력을 갖춘 작품이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작업방향의 그 성공적 실마리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58년 살롱 드 메에 초대 출품하게 됨으로써 그 보상을 받게 된다. 그 자신의 말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리에서의 데뷔라고 할 수 있는 살롱 드 메의 초대 작품에서는 완전한 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때의 작품은 프랑스적인 지성(知性)과 감성(感性)이 농후한 시정(詩情) 짙은 리리시즘으로 분류할 수 있을 듯한 경향을 띠고 있다. 커다란 터치들이 환기(喚起)하는 포름의 자율성이 화면을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그의 작품세계로 예시해 준 것이다. 그러한 태도와 표현정신은 1960년대 초반까지 구체적인 시각의 현실 체험 혹은 어떤 사념(思念)을 내면적 주제로 삼은 추상적 표현작업으로, 단지 의식적으로 변화한 세계가 아닌 시대적인 변천의 자연스러운 변화의 깊이를 조성하면서 파리에서의 입지를 확립시켜 나갔다


의식적으로 시대적인 변천에 따른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시대적인 것보다도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될 것입니다. 나는 원래 후기 인상파를 좋아했어요. 특히 세잔느를 좋아했습니다. 해방전 일본의 문전(文典) 입선 때는 더 아카데믹한 것이었지요.


남관의 살롱 드 메 첫 초대작은 <낙조(1958)>(도판11)로 명제 된 구체적 주제성의 추상적인 화면이었다. 그 뒤로 1959년, 61년에 초대받아 참가한 작품들도 그러한 구체적 형상작업으로 기법적인 세련성과 내면적인 표현성을 더해갔다.


그후 파리의 훌뢰브(Fleuve)화랑 등과 계약을 맺으면서 경제적으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여 작업실도 파리 교외의 아르꾀이유로 옮긴다. 1960년 <황폐한 뜰>(도판12), 1961년 <동양의 풍경)>(도판14)등 그의 작품은 이 무렵 파리 화단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한편 첫 결혼에 실패한 후 독신으로 지내왔던 남관은 1961년 유학생이던 김광섭 시인의 딸 김진옥과 결혼한다.


특히 1961년의 작품 <동양의 풍경>(도판14)을 프랑스 정부가 사들여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하게 한 사실은(1970년까지 상시 전시), 그 시점에서의 그 작품은 어떤 낡고 거친 벽면에 스며 있는 세월감과 그 상태의 무한한 정감을 내밀한 순수형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62년에 그려져 1964년에 파리의 트랑스포지시옹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에 전시했다가 파리시가 사들여 현재 시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허물어진 제단(1962)>(도판18)도 앞의 작품과 경향을 같이한, 오랜 세월 속의 시간과 공간을 동양적인 심사(深思)로 표상 시킨 종교적인 분위기의 추상적 작업이었다. 이렇듯 살롱 드 메를 계기로 많은 초대전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그의 작품을 취급하는 화랑이 생겨났다.


그의 분명한 자기 양식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체험의 재생은 60년대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공간을 메우는 어두운 마티에르와 얼룩진 동공(洞孔)의 반점(斑點)들이 신비하면서도 상징적인 포름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있다. 전쟁의 공포가 화면을 비집고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는 그러한 전율, 와해, 고통이 단말마(斷末魔)처럼 부침(浮沈)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시체(屍體)와 부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코, 입, 눈들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고 비뚤어져 있는 것 같았고, 전면(全面)에 받은 부상의 자국, 그것이 꼭 고성(古城)의 돌담 한 조각 같기도 하고, 석기 시대의 깨어진 유물(遺物) 조각들이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신음하다가 태양을 맞이해서 그 험한 자국이 강한 광선에 비취어 더덕더덕한 것 같은 꼭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쟁의 어떠한 부수적(附隨的)인 것도 아닌, 여과(濾過)되고 변형되어져 나온 질료(質料)이다. 현상(現象)의 세계가 아니라 존재의 세계를 발견해 가는 하나의 향기 높은 감성(感性)의 성과(成果)임이 분명하다. 한국 전쟁이 있은 지 10년만에 그는 비로소 아무도 하지 못했던 역사를 증언하는 기념물을 창조해 내었다.


이러한 남관의 작품세계에 내려진 1966년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 그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앵포르멜 미학에 접근한 형태를 추구하였던 약 10년간의 첫 단계 파리 작업의 절정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도판24)이 대상을 수상한다. 파리 정착 10년만에 남관을 그처럼 국제적으로 영광되게 하고, 유럽에서의 확고한 성공을 상징케 한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의 수상작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은 명제 자체가 시사해 주고 있듯이, 작가의 내면적 시각과 독자적인 조형성 및 정신적 특성을 은밀하고 매혹적인 색상의 분위기로 대단히 깊이 있고 세련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것은 <동양의 풍경>(도판14)이 파리국립 현대미술관에 상설 전시된 것과 함께 그의 생애에 가장 큰 보람을 안겨준다. 이후 남관의 잠재의식 속에 침잠 된 전쟁체험은 민족적 문화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형적 기호의 인간상으로서 소생하게 된다. 즉 앵포르멜이라는 동시대적 표현방식에 전통적 감수성과 개인체험에서 얻어진 이미지들을 하나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해 몽마르뜨르로 작업실을 옮긴다. 망통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해인 11월에 남관은 서울에 와서「남관서울전」을 개최하였다. 그것은 남관이 파리에 있으면서도 서울 화단과 연락을 계속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 1968년 남관은 유럽 각지의 화랑에서 초대전, 개인전을 갖게되어 무리한 작업과 도불초의 고생 휴유증이 겹쳐 휴양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고, 또한 계속된 화랑의 같은 경향의 작품요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위해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남관은 파리를 떠나 귀국 길에 미국 미술계를 견학, 뉴욕에서 드 쿠닝(De Kooning), 잭슨 폴록(J. Pollock), 모리스 루이스(M. Louis)등의 작품과 휘트니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관람함으로써 현대미술의 또 하나의 중심지를 경험하게 된다.


(3) 기호적 인간상의 추상표현시기(유럽과 서울) ( 1968 ∼ 1990 )


1966년 「남관 서울전」이 있은지 2년 후인 1968년 8월에 귀국한 남관은 당시 파리에서의 학생들의 소요와 이를 잠시 피해 뉴욕에서 3개월 정도 머물다가 한국에 3개월 정도 체류예정의 일시귀국이 영구귀국이 되어버렸다 한다. 거기다가 건강까지 나빠져서 쉬어볼 생각과 변화를 추구하고자 1968년 여름에 파리 베르까메르(Vercamer)화랑의 개인전을 마치며 귀국하였다. 이미 그는 1963년 첫 개인전을 시발점으로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 각 지역에서 권위 있는 초대전에 한해도 거를 틈 없이 초대되었고, 귀국때까지 유럽 각 지역에서 개인전도 하였다.


60년대 후반 남관이 귀국하였을 무렵 한국화단은 앵포르멜을 극복하려는 여러 가지 모색이 시도되고 있었고, 「AG」의 창립과 같은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관은 이미 구축된 자신의 표현어법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시대적 변화에 반응하지 않은 채「인간상」을 테마로 조형적 세계를 심화시켜간다.


귀국할 당시 남관의 나이 58세, 우리나라의 통념으로 따지자면 이른바 중진급 작가요 또 실제로 그럴 만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관은 일단 귀국하자마자 정력적이고도 폭넓은 작업을 펼쳐 보였다. 1969년 4월 국립공보관에서 자신의 체불기간의 작업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훑어볼 수 있는「남관체불작품전」을 꾸미며, 13년간의 파리에서의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 3백여점 가운데 50점을 추린 것으로 선명한 색채와 명확한 형태 구성으로 파리체류의 과정을 제시해 준 규모로나 질적면에 있어 우리나라 화단의 커다란 수확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귀국과 함께 그의 작품에도 약간의 변모가 뒤따르게 된다. 한층 밝아진 색조, 다듬어진 마티에르, 돌출 하는 형상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귀국과 더불어 그의 화면에 기호가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만이 갖는 특유한 기호의 성질은 기호 자체의 목적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복합적인 인간성과의 관련 아래 존재한다. 반복, 해체, 재구축 등 다양한 구성절차를 밟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호는 인간과의 관계를 등지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그 기초 자체가 인간형태라는 테두리 속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호의 이미지를 통해 연상되는 것 또한 인간내면에 수놓아진 원천적인 심상의 자취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호들은 연금술사의 비법처럼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덧붙여진 색채에 의해 한층 더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종전에 해오던 작품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처럼 상처 난 자국, 비극의 연출 따위는 발견되지 않지만, 그의 공간은 마티에르가 오묘한 색채 속에 용해되어 들어가면서 우리를 일종의 주술성, 원시성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60년대 허물어진 인간을 통해 인간본성을 탐사하려고 했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의 끈질긴 인간연구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에 초반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1972)>(도판40), <원시적인 군상(1974)>


(도판45), <읽을 수 없는 문자(1975)>(도판49), <친구를 위한 기념비(1975-6)>(도판50)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한국미술계는 이른바 평면주의와 탈이미지즘이 주류를 이루면서 물성(物性)과 신체성의 문제에 몰두할 때 남관의 작품은 상형문자의 구조성과 표현성에 몰두하여 화면은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바탕으로 한 서예적(書藝的) 기호들로 들어차고 그의 감수성이 돋보이던 색채나 색조는 배제된다. <정과 대화(1978)>(도판51), <영상(映像)(1978)>(도판52) 등이 그것이다.


남관의 작가 활동은 귀국은 했으나 실질적으로 파리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생을 마치기 전까지도 서울 아틀리에와 파리 몽마르트의 아틀리에 사이를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972∼76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로 로잔느에서의 개인전에는 유채, 과슈, 콜라주 등 40여점이 전시되었다. 이 무렵, 즉 1973년 베르카메르 화랑 초대전의 남관 작품을 보고 유명한 미술사학자인 동시에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베르나르 도리발(Bernard Dorival)은 전시평의 서문에서, "남관의 예술은 동서 두 문화를 융합시킨 것"이라고 서술하면서 절찬하였다.


남관은 1977∼78년 약 1년 반에 걸친 재차 파리 체류의 비교적 장기간의 해외 체류시기에 스위스 로잔느와 룩셈부르크에서 각기 개인전을 갖는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도 수시로 파리로 가서 한동안씩 제작생활을 하곤 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파리에서 더욱더 한국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것은 먼 고국의 그리움이 환상적인 작품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나이가 50이라면, 외국에 나가서 한바탕, 새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80이 가까워도, 그런 욕망은 항상 새롭다. 그런 욕망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므로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런 욕망은 부질없는 물욕과는 다르다. 욕망은 의욕을 낳고, 의욕은 곧 작품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욕망은 필요한 것이다. …파리에 있으면 서울이 그리워진다. 그러므로 환상적인 작품이 나온다. 달을 보며 서울을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남관은 1968부터 1977년까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파리 시기의 연장 형태로 줄기차게 창작된 작품들을 서울의 현대화랑(1972)과 신세계미술관(1974) 등에서 초대 개인전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전(國展) 운영위원, 국전심사위원, 한국미술대상공모전 초대작가 혹은 심사위원등을 역임했다. 1974년은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으며, 1981년에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는 등 한국의 앵포르멜 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에서 수립한 독자적인 양식을 꾸준히 지켜갔다.


노년기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열의는 색채구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청색과 백색의 색조대비, 초록, 빨강, 보라빛 주조의 중간색에 의해 정교하게 시사된 분위기는 그 신비성으로 인해 고요한 전율을 동반한다.


한편, 1980년대에 작품은 더욱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세계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생과 죽음에 얽혀 있는 천태만상의 인간을 예술로 승화하여 영원성을 갖게 하는 것이며, 기념비적인 것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한 세속, 즉 저차원의 존재형식에서 항구적인 고차원의 존재형식으로서의 전이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의 세계는 엄하고 진정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명상을 하게 한다.


또한 남관의 작품은 긴장이 이완되어가고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된다. 인간상들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가면극의 꼭두각시들이나 동화 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모습으로 환상적인 색채공간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달과 환상>(도판62), <태고의 염(念)>(도판63)들이 그것이며, 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은 한국근대사와 더불어 시작된 한 화가의 역정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황무지였던 시대에 일반의 몰이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해온 치열한 실험정신의 구가였다. <푸른 율동(1984)>(도판76), <얼굴들(1988)>(도판81) 등의 작품에는 스크래치기법이 채용되어 유희적 요소를 강화해주고 있다. 미술가의 제작태도에 있어 최종단계는 유희의 단계라 했던가? 고희를 넘어서는 작가로서의 삶에 반세기를 지나 노니는 경지에 이르러 있는 듯 억눌린 전쟁체험이나 자기정체성을 확인해 보이기 위한 한국적 미의식의 제시나 지나친 실험의욕을 벗어나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심경으로 돌아가 환상적 동화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1988년 <얼굴들>(도판83)의 작품은 다소 해학적이고 유희성을 띠면서 보다 환상적 세계로 흘러간다. 그리고 <삐에로(1982)>(도판69), <달과 삐에로(1985)>(도판77), <삐에로가족>(도판78,84,85,86)을 주제로 한 과거의 축축한 습윤성을 띤 파스텔색조의 화면 대신 선명성과 청징성을 띤 색채로 덮인 화면으로 변모해 간다.


남관은 1981년 8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격적인「남관초대전」을 개최하였고, 또한 1983년 6월에는 서울국제화랑에서「남관소품전」, 1984년 11월에는 중앙갤러리 개관기념으로「남관 창작 50년의 예술세계」로 회고전, 1987년 10월에는 예화랑의 초대로「남관초대전-푸른회상」, 1988년 9월에는 현대화랑에서「남관초대전 1968-1988」그리고 1990년 3월에는 동경의 국제무역센터에서「남관전」등 끊임없는 전시로 역사와 현실, 생과 사를 자신의 예술세계로 표현하였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슬프고 고독한 일이다. … 작가는 그런 슬픔이나 고독을 무릅쓰고 이겨나가야 된다. …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나아가서 인간의 예술행위는, 크게 문화 전반을 생각한다면 그 중의 아주 조그마한 일부분이다. 그 조그만 일부분인 예술이 왜 중요하냐, 그것은 예술이 인간정신의 지주이기 때문이다. … 전통은 이어지되, 뿌리로, 속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뿌리가 없이, 속이 비고, 정신은 빠져버린 채 형식만 강조되면, 그런 전통의 계승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올바른 예술문화의 발전은 그렇게 새로운 전통의 창조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예술의 발전, 정신의 발전 없이는 국가가 절대로 발전 할 수 없다. … 좋아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다. 일을 하는 순간순간 그 일의 즐거움이 샘솟는다. 그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희열이다. 그런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인생은 행복하다. … 그래서 작가는 그것을 계속한다. 그것은 자유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방법으로써 하는 자유이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부지런함이 배어있는 남관의 감추어진 모습과 외부출입이 거의 없이 오직 유일자(唯一者) 같은 상태에서 꾸준히 그림을 계속하는 화가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남관이다. 그것은 창조자로서의 노화가들 모두가 걸어가는 길은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좀더 편하게 일손을 조금 멈추고 쉴 수도 있는 것인데, 마치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노화가는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또한 생전의 남관에게는 금욕주의적인 일면이 있었으며, 자존심도 강하였다. 이러한 개인적 성향은 예술적 관념과 혼합되어 고독한 예술가로, 때론 은둔자의 모습으로 비치게 하였다. 지칠 줄 모르는 그는 친구들과의 교류도 접어둔 체 오직 작품과의 대결을 하며 그림에만 전념을 하였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고민은 더 심해진다. 작품을 하다가 보면 언제나 자꾸 다른 문제가 발견되는 것이다. 파고 들어가면 파고들수록 언제나 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더 맹렬히 해야 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은데서 심한 고민이 생긴다. 그럴 때에, 친구들끼리 농담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대처해 갈 수 있으면 행복 할텐데 내 성격으로는 그것이 안 된다. 내 작품의 근본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 진화랑과 동경아트엑스포에 나가기로 하고 병중에도 작품제작에 매달려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남관은 동경국제무역센터에서 아트엑스포가 열리던 3월 30일 80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생을 마칠 때가지 일관된 남관 예술은 도불이후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많은 변모를 거듭했다. 그러나 변모라고는 하되,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선적으로 또 단계적으로 변해 가는 진화론적 변모는 아니다. 그 변모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하며 증폭되고 증식해 가는 삶의 체험적 생성의 그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가꾸어 낸 꿈, 환상, 환영, 명상 그리고 축제에 의해 풍요로워지는 그러한 변모이다. 또한 첫 원칙에 충실하여 1960년경에 파리 체류 때에 발견한 자기 그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여주며 자기원칙에 충실한 화가였다. 남관은 1990년 작고 작가에게는 주지 않는 관례를 깨뜨리고 고인이 된 후에 제35회 예술원상을 받았다. 또한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주기 추모전인 "80년의 생애와 예술전"과 1995년 갤러리 현대의 "5주기 추모전" 등 이외에도 전시회가 이루어졌다.


 


4. 남관의 작품세계 분석과 특징


1) 작품세계분석



(1) 인물화


남관은 화가로서 중요한 시기를 외국에서 보냈다. 더욱이 예술형성의 배경은 그 작가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남관은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수업한 다음, 그의 아카데믹한 기초실력이 인정되어 쿠마오까(態岡)미술연구소에서 회화연구원으로 5년간 미술을 공부했고, 그 후「후나오까 賞(1942)」「미쯔이 賞(1943」등 아카데믹한 상을 획득한 다음해 종전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이 무렵의 작품들이 동경폭격과 전후의 혼란기 그리고 625의 전란 등으로 인하여 거의 분실되고 없다. 비단 남관만의 불행은 아닐지라도 이것은 우리 미술계에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25년 도일(渡日)하여 해방 때까지 줄곧 일본에서 미술에로의 길에 나서게 한 것은 당시의 동경이 지니고 있었던 미술적 환경이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미술의 풍토는 20년대를 전후해서 패전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있어서 서구문화의 흡수라는 소용돌이와 함께 서구미술의 대대적인 도입에 대한 열광과 인상주의 이후의 새로운 20세기 회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포비즘, 큐비즘을 거친 에콜 드 파리의 영향이 짙게 깔리고 있던 일본 미술은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의 포비즘 운동을 「야수주의」라는 이름으로 받아 들여 강렬한 원색, 분방한 텃치, 기름끼의 끈적거리는 마티에르를 강조하면서 오히려 큐비즘으로 연결되는 조형성을 파기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포비즘은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인 동시에 특히 남관으로서는 결코 동화될 수 없는 미학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남관이 초기에 포비즘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은 일본화 된 포비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만일 그가 리얼리즘의 과정을 거쳤다면 그것은 대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자기에게 이끌어 온다는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었을 것이요 주어진 대상에의 성실성보다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요청에 보다 충실을 기하는 화가로 그는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남관에게 있어 한 회화작품이란 표현이기 이전에 조형이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관의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은 1948년, 49년 그리고 50년에 걸쳐 열린 귀국 후의 개인전을 거쳐 1954년에 가졌던「도불기념전」에서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44세의 중진작가로서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의 작품 경향은 <검도복의 소년(1943)>(도판1)의 작품에서 확인되듯이, 붓 터치와 색채 구사에서 내밀한 표현 감정을 부각시키며 향토적인 주제를 짙은 정감의 분위기로 표현하려고 한 현실적 서정주의였다. 구도와 인물의 포즈 및 붓 터치 등에서 그 당시 동경의 미술적 환경인 인상파와 세잔(도판98)에 심취하였음을 구도와 인물의 포즈, 붓텃치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데생과 안정된 화면은 인물의 양감과 표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파이프가 있는 정물(1946)>(도판2)은 해방후의 작품으로 대상의 선택과 구도면에서 신중한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입체주의의 기본적인 시각인 단일시점으로 투시법을 무시하였으며, 물감을 붙이는데 있어 반투명적 효과와 전체적으로 견고한 색감 처리는 세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의 노인들(1951)>(도판3)은 일전(日展)에 출품했던 것이며, <농부가족(1951)>(도판4)은 동경의「포름」화랑의 초대전에 전시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고향에 대한 추억이나 정서적 체험에 관련된 소재들이 다루어지고 있으며 세잔느, 브라크, 야수파 등의 영향이 복합되어 대상물에 대한 해석은 세잔풍으로, 화면구성은 브라크의 표현방법으로 표현되며 색채나 마티에르의 구사에서는 야수파의 영향이 보인다. 촌노인들의 순박한 모습이 단순하면서도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한국의 토착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대각선을 이루며 화면을 압축하고 있는 인물들의 배치는 치밀한 구성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1954년 미도파화랑에서 연 도불 기념전에도 출품되었으며 남관의 전통적기법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부가족>(도판4)은 1951년작으로 향토적인 풍경을 표현의 소재로 한 초기 작품 경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토착적 정서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산기슭에 나무들을 도식적으로 그리고 둥근달이 떠있는 야경으로, 불이 켜진 초가집을 배경으로 아이 업은 여인과 소를 타고 있는 남자가 화면의 좌우로 분리되어 있으며 평면구성으로 해체되어 대상의 형태보다 이미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감을 바른 후 다시 나이프로 긁어내어 투명성을 띠고 있는데, 어둡고 밝은 두 색조의 물감흔적과 대상의 구체성을 박탈하는 색채감각과 서정성이 엿보여 이미 추상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노인(1955)>(도판5)은 남관이 프랑스로 떠난 해와 같은 연도의 작품이다. 즉 파리에서의 첫 작품으로 입체파의 면분할에 의해 대상의 처리 변화를 보여준다. 향토적인 분위기로 한가로이 잡담하고 있는 한복을 입고 장죽과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는 두 노인은 확실히 토속적인 지방의 풍경을 표현하였다. 1951년의 작품 <고향의 노인들>의 세 노인 중 행상을 하고 있는 노파만 안 보이는 두 노인만 그대로 보여지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단색조로 채색되어 회화적인 입체감이나 공간성이 없으며 영상의 흔적으로만 나타난 두 노인을 보게 된다. 이 두 작품을 비교하면 남관의 초기 작품의 변화를 쉽게 볼 수 있다.


<습작(1955)>(도판6) 남관은 카페 도톤느 건너편에 있는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엘」에 수업료를 내고 4년간 다니게 된다. <습작>은 당시의 작품으로 모델을 뛰어난 구상실력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정확한 데생과 동세의 표현하였으며 명암처리와 공간표현의 사실적 표현력이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으며, <파리에서>(도판7)는 <습작>에 비해 입체성이 좀더 와해된 색채처리를 보여주고 있다.


<콤포지션(1955)>(도판8)은 추상적 표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면에 나타난 율동성과 화려한 색채는 우리 고유의 민속무용의 한 장면을 대상으로 한 표현으로 고유의 민속무용 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 몇 명의 무희들의 율동적인 움직임을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춤의 동적인 질서를 작가가 다채로운 색채로 표현한 작품이다. 회화적인 변화는 밝고 다채로운 색으로 빨간색노란색푸른색과 흰색이다. 제각기 독립적으로 분할되어 여러 방향으로 칠해져 있으며, 그 각도와 선이 다양하여 동적이고 생기 있는 화면을 보여준다. 즉 시각세계를 자신의 시각으로 색채를 환원하여 거기에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용수의 움직임은 동작의 연속성을 띄는데 미래파의 경향과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도판100)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위와 같이 남관은 초기 탁월한 데생실력과 구성력을 바탕으로 그 나름의 주관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파리로 가기 전까지 남관의 작품경향은 사실적 표현방법에서 입체파적인 화면의 평면화, 단순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등의 여러 구상적인 표현방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파리의 초기에도 계속되어 추상화되어 가는 필연적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가 지닌 구상적 작업에서 추상적 작업으로의 과도기적 과정은 현대회화의 전통적인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단층적 심상추상


앵포르멜은 세계 12차대전을 치루면서 르네상스 아래 전개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세계관이 붕괴된 상태에서 의식하의 세계나 동양의 자연주의에서 해결방안을 찾은 것이었다.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미학의 파기 몸짓에 의한 자발적 행위,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따른 허(虛)의 공간 등을 새로운 미학적 근거로 삼으면서 회화에서 근원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동양의 작은나라 한국인으로 2차례의 전쟁을 경험한 남관이 1955년 파리에 도착할 당시는 뜨거운 추상미술인 앵포르멜의 전성기였다. 도착 후 제일먼저 미술관, 전시회를 관람한 남관은 파리 화단의 다양한 추상미술을 경험하여 자신의 작업방향을 한국에서 체험한 모든 것을 모티브로,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방법으로 정하였으며 작업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표현방법도 차츰 변화된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예술가였던 남관의 첫 파리 시절은 어둡고 쓸쓸한 시기였다. <밤(1955)>(도판9), <낙조(1958)>(도판11), <황폐한 뜰(1960)>(도판12)들의 어두운 색채처럼 몽파르나스 정착하게 남관은 값이 싼 대신 어둡고 축축한 아틀리에서 한낮인데도 전등 빛만을 의지하며 오직 제작에만 열중하였다. 이 어두운 지표로부터 새로움을 찾고자 한 예술탐구의 작업은 인적이 드문 몽파르나스를 산책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밤(1955)>(도판9)은 남관의 내면의 세계를 자동묘법을 시도한 것으로 물감에 용해제를 많이 넣어 묽게 하여 떨어뜨려서 번지고 스며들게 하는 타쉬즘의 기법을 채용하고 있다. 동양적인 수묵화나 서예의 흑색을 번지게 하는 효과를 이용하여 어두운 밤 또는 아무것도 형성되지 않는 태초를 연상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우연의 효과는 심상(心象)에 접근해 가는 표현으로 60년대에는 하나의 정형(定形)으로 표현된다.


<낙조(1958)>(도판11)는 남관의 예술이 파리화단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인정된 작품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1958년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100호로 지는 해가 크게 나와 있는데, 화면에는 긁힌 흔적도 있는 파리에서의 생활이 4년째 되는 무렵의 추상작품이다. 검은색과 흰색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향수적인 정감을 반영하고 있다. 검소한 색조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잠재된 영상이 '낙조'로 비유되어 화려하였던 젊음을 회상하는 것으로 생각 할 수도 있고, 이국 도시인 파리의 낙조를 흑백색의 교차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추상화된 이 작품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고국을 떠나 이국 땅에서 그려보는 고향에 대한 향수가 <낙조>라는 이 작품을 낳게 한 것으로도 보인다. 살롱 드 메의 초대는 남관과 같은 성숙된 지성과 자신의 체험과 심정을 추상적 기법으로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작가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이후 살롱 드 메에 5차례의 초대된다.


<황폐한 뜰(1960)>(도판12)은 습기 찼던 벽면이 햇볕을 받아 습기가 증발된 마티에르를 보여주고 있다. 햇빛이 직접 드리우는 아틀리에를 파리에서 가까운 교외인 아르꾀이유에 이사하여 그곳에서 그린 작품으로 화면의 마티에르는 지표를 연상하게 되며 마치 고분이 발굴되어 오래간만에 햇빛이 비치어 드러나는 벽화의 모습 같은 작품이다. 이것은 뒤뷔페가 주장한 원생예술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형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 초기 작품은 역사의 흔적 등 원시시대의 유적의 느낌을 주고 있다.


<동양의 풍경(1961)>(도판14)은 남관의 독자적인 작품경향이 틀 잡히기 시작한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파리국립근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대 역사의 유적이 발견된 것처럼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오랜 시간의 경과로 균열된 모습은 어두운 마티에르를 뚫고 나타나 전쟁 중에 처참하게 죽어간 인간들의 회상과 추도의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것은 자신의 전쟁 체험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생명의 영원성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밤 풍경(1961)>(도판16)은 남관의 예술이 파리화단을 구성하는 실제적인 실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작품이다. 파리의 오페라거리에 위치한 훌뢰브화랑(Galerie de Fleuve)이 이 작품의 전시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화상의 후견 없이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좋은 화랑과 계약한다는 것은 작가의 창작력을 고무한다. 이 작품은 흑색과 백색으로 이루어진 색과 면의 단조로운 추상세계를 보이며 동양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태양이 서양적이라면 달은 동양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달은 동양의 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파리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듯 보인다. 어둠 속에 드러난 각진 구조물은 환상적인 분위기와 심리적인 갈등을 보여주며, 침식되어 가는 생명과 물체, 모든 존재의 시한성이 풀려지지 않는 고민으로 작가에게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끊임없이 회상되는 화려한 생의 모습이 어둠으로 침식되어 잔재만 보이는 현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남관은 파리 정착 직후부터 작업을 하면서 실험을 거듭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견하였다. 1960년의 <환상(습작)>(도판13)에는 처음 인간형상이 나타나며, 1962년 <환상>(도판17)에서는 남관의 전형적인 형상의 구축적인 마스크가 나타나 어떤 건축적인 구조물, 오랜 인간 역사의 흔적에 대한 구조물의 주술적 효과를 표현하는 초기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의식의 심연에 잠재된 전쟁의 체험들이 서서히 고국의 문화정서들로서 되살아난다. 이끼 끼고 곰팡이가 핀 축축하게 버려진 담벽이나 그을린 성벽과 같은 풍경의 편린으로서 이러한 심상(心象)풍경은 <허물어진 제단(1962)>(도판18), <독백(1962)>(도판19), <가을언덕>(도판20), <역사의 흔적(1963)>(도판21), <허물어진 고적(1964)>(도판22), <자색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4)>(도판23),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도판24) 등으로 나타난다. 흘리고 번지는 우연의 효과 위에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종이를 붙였다 떼어내는 모노타입 기법이 채용되며, 그 위에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나 색조들은 점이기법으로 드러냄과 감추임이 미묘한 긴장을 자아낸다. 비로소 남관의 작품세계가 확고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허물어진 제단(1962)>(도판18)은 어둡고 환상적이다. 어두운 바탕에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는 옛 석탑의 잔영은 지난날의 화려했던 영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어두움 속에 황금빛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현재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1964년 파리의 트랑스뽀지숑 화랑(Galerie Transposition)에서 전시된 것을 파리시가 사들인 것이다. 또한 이 개인전에 프랑스의 비평가인 죠제 삐에르(J. Piere)가 남관의 형상을 프랑스어로 표현하여, 남관의 예술이 프랑스인 들에게 소개되는 첫 계기가 된다.


<독백(1962)>(도판19)은 남관의 작품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주제로 색채가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보인다. 검은 물감의 여러 흔적이 보이는 어둠 속에 밝은 색이 몇 개의 점으로 나타나 환상적인 인상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 제목처럼 <독백>은 어느 절망적인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작가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망령처럼 보이는 환상적인 영상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어느 한을 독백하고 있는 듯하며, 현세에 대한 불만을 망령이 독백하고 있는 것도 같다. 작가는 이러한 <독백>작품을 통하여 자신이 품고 있는 인간적인 모순과 갈등을 표면화하고 그것에 대한 충격과 분노를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625전쟁에 대한 고통과 시련이 뿌리깊게 그에게 남아 있어 망령의 독백으로 회상되고 있는 것 같다.


<환상(1962)>(도판17)은 작품경향을 달리한 것으로 이 시기에 남관의 작품에는 동양적인 역사의 흔적 같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고대의 유물 또는 전통적인 상형문자를 떠올리게 하는 암시적 기호물이 드러난 일정한 얼룩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우연과 절제가 상징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추상적 작품이다.


<역사의 흔적(1963)>(도판21)은 밤과 같이 어두운 화면에 형상이 나타나는 <허물어진 제단>(도판18)과 달리 고대 유적의 주춧돌과 같은 형상이 드러나며 어두운 화면을 벗어나 밝음으로 향하고 있다. 이 무렵 남관은 파리 화단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기 시작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안정감 찾아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채에 노란색이 가미되었고, 복잡하게 얽힌 면과 선은 기하학적으로 재구성되어 화면을 가득 메운 이미지들은 변화무쌍하게 변형됨으로써 역사와 시간 속의 인간을 시사해준다. 화면 위에 붙였던 물질이나 재료가 제거되면서 만들어지는 예기치 못한 우연한 효과를 통해 단층적으로 표현되었다.


<허물어진 고적(1964)>(도판22) 등 일련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바, 화면은 흔히 이끼 낀 자국과 오랜 세월에 그을린 듯한 바위의 표피, 또는 옛 돌담의 얼룩을 떠올린다. 번지며, 흐르고 또 서로 침식해 가는 이끼와 비바람에 삭은 듯한 얼룩의 조화는 어떤 원초적 세계, 잊혀진 세월을 느끼게 한다.


<자색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4)>(도판23)은 1965년 파리의 플로랑스 우스통 브라운(Florence Houston Brown)화랑의 초대 개인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평론가 앙리 갈리깔리(Henry Galy Carles)는 이 전시회를 통해 남관의 예술을 고국의 영상과 사물들의 추억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상으로 형성하여 동양적인 특성은 지닌 예술이라고 평하였다. 이 작품은 한국의 흙벽과 나무기둥을 형과 색으로 표현하였으며 한국적인 토착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붉은 흑색은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에도 계속 나타난다.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도판24)은 바로 유럽화단에 남관의 위치를 굳히게 한 작품이다. 망통 회화 비엔날레(Biennale de Peinture Menton, 1966)에서 대상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망통은 남프랑스의 니이스와 인접한 지명이며, 이 지역의 유럽궁에서 격년제로 개최하여 순수한 회화만의 프랑스적인 중용(中庸)과 예법을 갖춘 초대형식의 미술제이다. 망통 비엔날레 초대는 그만큼 파리에서의 남관의 입지를 뜻하며, 더욱이 대상의 획득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 해의 특별 손님은 피카소였고 특별상은 타피에스와 폴리아코프가 지명되고 있었다. 이 작품은 현재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미학연구원(International Centre of Aesthetic Research)이 소장하고 있다. 이것은 전시기관인 미술관이 소장하지 않고 연구기관인 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연구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고대의 벽화 같기도 한 작은 마스크의 형상이 조심스럽게 드러난 이 작품은 이후의 작품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형상이 더욱더 구축되었으며, 그의「동양적인 것」은 하나의 전형적인 지표가 된다.


(3) 기호적 문자추상


남관은 동양적인 것의 전형적인 작품경향을 꼴라주의 독특한 기법으로 역사의 유적들을 연상하게 하는 형상을 표현하였다. 그것은 다시 동양문자의 구도와 같은 사각으로 정리되며 1966년부터는 마스크와 상형문자의 구조적인 형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인다.


남관은 1962년부터 문자의 조형성에 흥미를 갖고 조심스레 시도를 하였으며, 1965년 파리의 우스통 브라운 화랑 개인전 때에 '읽을 수 없는 문자' 혹은 '상형문자'적인 형태를 암시하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남관의 작품들에는 작가의 심리적 심연에 축적된 것들이 독특한 조형언어로써 이루어져 가는 한 과정을 헤아려 볼 수 있는데 「상형문자」는 그의 내부의 깊은 곳에 쌓인 원시의 형태와도 같은 정신적인 연륜이, 작가의 조형의지를 따라 선이나 형태로서 구성되고 미묘한 색채들에 의해 교감 반영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상형문자들의 화면에서는 그런 형태성과 아울러 미묘한 색채의 투명성, 유동성, 광휘성이 반짝인다.


남관은 「상형문자」에 대한 작품형식과 표현태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상형문자」로 비유되는 그런 형태는 내가 의식적으로 동양의 상형문자를 표현하려고 한 것과는 다릅니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니까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그런 것은 반대입니다. 그저 꽁뽀지숑을 하다보니까, 글자 같은 것이 들어가고 그런 기호(記號)들이 반영, 반사되는 화면이 이루어지지요. 그러니까 그런 내가 만든 글자라고 해도 될거예요. 내가 한국인이니까 의식적으로 동양적인 것을 안 해도 저절로 동양적인 게 나올텐데, 일부러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어요? 서양사람들은 화면에 이그조틱한 거라도 넣으면 동양적인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해서 얼른 관심을 끌기는 쉬워요. 그러니까 나는 동양적인 것보다는 세계적인 것, 세계로 통할 수 있는 것, 그걸 항상 생각하게 돼요. 내가 쓰는 재료는 서양 겁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세계적인 것이 아녜요? 마티에르가 동양화 재료와는 다릅니다. 한국 작가가 한국적인 것을 하기는 오히려 쉽지요. 어떤 경우, 한국사람이 흰색만 써도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적인 것과 연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좁은 세계지. 「세계」에 통하는 넓은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미술의 표면상의 난해성에 대하여 그 작가들은 대개 자신의 이론적 논리를 정연하게 제시하거나 적절한 설득력의 해명을 스스로 준비하게 마련이다. 남관의 앞의 말에서도 그의 작품 형식과 표현태도를 이해시키는 데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파리에서의 예술적 변신의 창조적 신념 및 독창적 실현의 바탕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남관 예술을 성립시킨 '읽을 수 없는 문자성' 또는 '동양적인 기호성'은 파리로 간 뒤로 역시 앵포르멜 미학의 감화와 무관하지 않게 형성된 국내에서의 전통적 수묵화가 이응로의 '동양적 문자성'의 추상적 화면 또는 꼴라쥬 작업의 내면과 상호 동질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각기 자신의 세계로 변화시켜감으로써 표현재료 곧 화선지에 수묵, 담채, 채색 수법과 캔버스에 유채 등의 상반성과 더불어, 별개의 작품성과 조형성을 정립해 보였다.


파리시절 전쟁의 체험에서 나온 역사의 흔적들, 먼 기억에 대한 회상 등 한국에 대한 영상을 독특한 추상기법으로 동양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하던 남관은 귀국하기 전인 1967년에는 마스크와 상형문자와 같은 형상을 가진 작품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것은 색채가 점차로 밝아지는 신비로운 색채와 단층적인 추상적 구도가 형상적으로 변화한 마스크와 상형문자들로 이들 형태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상형문자의 깊은 뜻이 곧 마스크 같은 것이 될 수 있으며 기호적인 상형문자가 인체이자 얼굴이며 마스크인 것이다.


<공포(1967)>(공포25)는 남관의 전형적인 형상인 마스크로 표현된 작품으로 전쟁중에 체험한 흰 눈속에서 나타난 까만 얼굴의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다. 검푸른 형상에서 전쟁의 공포가 느껴지는 이 작품은 한국의 장승(도판104) 또는 하회탈 중 각시탈(도판103) 형상과 유사하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장승이 무섭고 험상궂게 보이게 하여 수호신으로서, 또 얼굴과 탈을 씀으로써 자유를 얻고 춤을 출 수 있었던 한국의 해학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참했던 전쟁의 잔재가 이 작품 속에 있는 것이다.


<태고(太古)(1967)>(도판27)는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기념초대전에 출품한 것이다. 태고의 형상은 마치 동이 트자 세상이 밝아지면서 삼라만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여명(黎明)의 현상처럼 해석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길고 먼 어두움의 시련이 상대적으로 해맑은 뜻을 일깨우는 생명현상처럼, 여기서 보여주는 강렬한 맥락으로서의 형상은 1968년 베르까메르(Vercamer)화랑의 초대전을 계기로 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남관의 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1968년 베르까메르 화랑의 초대전에서 미술평론가 장 자크 레베크는 <태고>와 같은 남관의 형상 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동양 사람들이 어떤 사물의 성격을 명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마스크 속에는 시간을 초월한, 혹은 시간을 고정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 오랜생명을 가진 예술-그 가치가 현재를 넘어서 미래에 보존될 예술은 그의 다채로운 광채를 한꺼번에 쏟아서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그 참다운 모습이 발견된다. … 예를 들어서 전쟁 때 그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부수적인 것을 찾지 않고 그 넘어 본질적인 것을 찾았다. … 모든 피상적인 감정을 떨어버리고 깊은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통찰한 나머지의 비창한 대화라고 하겠다. … 남관의 마스크의 아름다움은 저 신비로운 바로크섬에 있는 조각들의 아름다움이요, 또한 침묵에 잠겨있는 성스러운 우상의 아름다움이다.


<태고(太古)>는 한국적 탈의 한 전형(典型=돌머리집의 패턴)과 동양의 문자기호(文字記號)의 특색인 선조성(線條性)과 긴장성(緊張性)으로서의 상형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힘찬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태고(太古)>는 이후의 남관의 두드러진 표지(標識)로 나타나며 전쟁으로 인한 처참한 체험에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비극적 인간상을 마스크라는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마스크의 형상은 후일「묵상」시리즈로 나타나게 된다.


<그늘(1967)>(도판28)은 화면에 두 영상이 환상적인 상태로 나타나 구축적임을 알 수 있으며 탑과 같은 모습 같기도 하는데, 우리의 토속적인 지방의 천하대장군상을 연상케 하며 또한 인간의 잔해상을 떠올린다. 결국, 세월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모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색채는 밝아졌고 단색조의 색감을 나타낸다.


<하나의 형태(1967)>(도판29)는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차지한 남관이 시대적인 미술의 경향이나 유행성 등에 전연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예술세계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캔버스를 이용하여 작품으로 그의 인간상을 조형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기괴한 형태의 상은 역시 두 개의 형상이 동반하고 있어 회화세계로 전이한 현실일 수도 있고, 또는 사라진 옛날이 환상적인 영상으로 현실화된 것일 수도 있다. 1968년 베르까메르화랑이 계획한 「유사(類似)와 공명(共鳴)」이라는 주제전(主題展)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파리화단에 알려진 26명의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한편 이 계획적의 취지는 본래의 미술이 정신적 지혜와 물질적 지식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통일적 질서로서 오늘처럼「이미지」와「오브제」로 분할된 데 대한 재융합이 테마인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눈(1968)>(도판31)에서는 마스크의 형상이 소멸되어 가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1968년 파리 베르까메르 화랑에서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장 자크 레베크는 서문(序文)에 다음과 같이 남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시체와 부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전면에 받은 부상의 자국, 그것이 꼭 고성의 돌탑 조각 같기도 하고, 석기시대의 유물 조각들이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신음하다가 태양을 맞이해서 그 험한 자국이 강한 광선에 비치어 더덕더덕한 것 같은, 꼭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완전한 형태나 피부를 가진 것보다 그 내포된 생명, 즉 본질과 의의가 문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통속적으로 아름다운 것보다는 잔혹한 고비를 넘어온 인간상, 그와 같은 잔혹한 경지를 겪으면서도 자기 외의 어떤 커다란 힘, 즉 신(神)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악착같이 생(生)을 이어가려는 그런 인간상이 한층 더 나를 유혹하였던 것이다.


<읽을 수 없는 문자(1968)>(도판33)는 남관이 귀국한 해인 1968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로 그 흔적만을 간직한 채 깨어지고 닳아서 읽을 수 없는 고대의 비문 같은 작품이다. 상형문자(象形文字) 같기도 한 형상들이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데, 그 문자들은 읽을 수가 없다. 곧 남관 자신의 심정을 표현 한 역사속에 사라져간 영혼을 위한 비문이라 하겠다.


<검은 형태(1970)>(도판34)는 이제까지의 이른바 마스크의 세계가 그 내부로부터 와해(瓦解)되어 흩어지려는 것처럼 보여 졌다면, 이 작품은 남관의 새로운 변환을 암시하는 세계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지식과 예술이 화면의 어떤 신비로 형용되는 전율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의 마스크가 신화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전개될 역사시대를 이 작품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푸른 반영(反映)(1972)>(도판35)은 파리 베르까메르화랑의 개인전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청색 바탕에 외피가 벗겨진 흔적처럼 보이는 흰색의 상형기호들이 시간의 경과로 인해 바랜 비문처럼 역사시대가 대두된다. 이 작품은 동양적인 세계관으로서의 오행(五行)의 구도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형상이 펼쳐진다. 앞으로의 남관은 이러한 기호로 지속되는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한편 1973년 2월 베르까메르에 붙여진 베르나르 도리발(Bernard Dorival)은 소개문에서 남관을 봄을 그리려면 겨울에 있어야 하듯이 남관은 동양을 그리기 위해 서양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라고 전제하면서, 그의 화면은 한국적 의상의 빛인 향수 어린 남빛 바탕 위에 한국적인 글자들이, 섬세한 모양으로 또는 시운(時韻)의 가락으로 드러나 서양과 동양을 하나로 구성하려는 세계라고 하였다. 즉 서양적인 재료를 사용하면서 동양적인 모티브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남관은 한국이 자랑할 만한 작가이며, 당시의 전시회의 가치를 매우 소중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옛 형태(1972)>(도판38)와 <보라색 녹색의 반영(1973)>(도판42)은 1973년 파리의 베르까메르화랑에서 발표되어 큰 반응을 일으킨 작품들이다. 1968년 뵈르까메르전의 작품보다 화면이 온통 현란한 색면으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문자(文字)와 공간(空間)(1972)>(도판39)은 1978년 룩셈부르크의 뀌떼(Kutter)화랑에서 발표된 것으로서 그곳의 평론가인 조제프 항크(J. Hanck)는 도리발의 남관평에 동조하면서 그의 화면은 아름다운 색감 위에 우리들로서는 먼 이국의 상형기호를 연상케 하는 섬세한 형상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평하고 있었다. 우리의 한글 문자와 한문자가 섞여 보이고 있어 남관의 민족적 정신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러한 형식이 한국인의 문화와 그 역사, 그리고 가치를 예술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였다. 미술의 기본적인 형상성이 발생에 따른 사실에서 작가 남관의 구상성이 엿보이나 어디까지나 표현상 변화의 단계에 불과하다.


<읽을 수 없는 문자(1972)>(도판40)는 단색조의 색이 화면을 완전히 덮고 있다. 마치 우리의 한글 문자로 이루어진 한 장의 글문 같은 인상을 주는 화면이기도 하다. 남관이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려는 기념비를 장식하는 세계이며, 바래고 깨어진 오래된 비문으로 인간의 문명단계를 유추하는 경과처럼, 남관의 내부에 침전되어 있던 언어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1974년 신세계화랑의 초대전에 출품된 작품이기도 하다.


<선(線)의 구성(1973)>(도판41)은 소품이지만 독특한 공간구성과 색의 조화가 뛰어난 작품이다. 어떤 의식(儀式)에 부여된 매우 화려하고 고귀한 품격을 자아내고 있으며, 흰색 바탕을 배경으로 푸른 띠를 띄우며 부각되는 이 형식 속에서 우리들은 신라(新羅)의 금관(도판102)을 연상하게 된다. 이 작품경향은 1977-8년 <묵상>(도판53-55)에서 더욱 두드러진 대상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작품에 한국전통의 형상을 부여하여 다양한 조형예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물관 인상(1974>(도판43)은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듯 사라진 옛 역사와 문화를 회상하게 하여 친근감을 갖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사라진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으며, 제각기 환영처럼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어떤 종류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시적인 군상(1974)>(도판45)은 상형과 기호의 표현형식을 빌려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의 모습을 여러 형태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군상은 장식문양의 옛 흔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원시적인 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단색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회화적인 색채성이 없어 형태가 더욱 노출되고 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영상세계의 시각화로 그가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상은 그러한 영상들이 독백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


<은색구성(1975)>(도판46)은 은색(銀色)지를 사용한 일종의 꼴라쥬 작품이며 현재 룩셈부르크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룩셈부르크 미술관장인 뮬레(J.E. muller)는 남관의 예술은 외계의 현상을 직접 옮겨 놓은 세계는 아니며, 모든 것이 하나의 열의와 정밀한 감각을 여과해서 나타나는 세계라고 평하고 있다


<마스크(1975)>(도판47)는 인간세계를 표현한 작품으로 인간의 탈들이 상형문자를 연상케하여 작가 자신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알려준다. 화면은 청색의 단색조로 되어 색채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억제하였으며 규칙적으로 나열하여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인간세계의 희로애락을 알려주는 것 같다.


<대화(1975)>(도판49)는 대작이 아니고 두 개의 단순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회화적으로 의인화된 기호의 한 쌍이 음과 양으로 어울려지면서 그야말로 대화의 인간화단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친구를 위한 기념비(1976)>(도판50)는 남관 예술의 어떤 절정 내지는 전성기를 보여주는 세계로서 이 작품에서 우리는 미술 그 자체를 느낀다기보다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된다. 이 작품도 뵈르까메르화랑에서 발표된 것인데 이곳의 초대전으로 세 번째가 되는 1976년도의 발표였다. 당시 파리의 지성지(知性誌)인 르 몽드는 남관의 세계를 기사로 옮겼으며, 그의 화면은 항시 세련된 극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볼 때마다 새로움을 느낀다고 르 몽드의 평자인 쟝마리 뒤느와예(J. M. Dunoyer)는 말하고 있다. 한편 <친구를 위한 기념비>에 대해서는 한국의 서체(書體)여서 한국의 문자를 해독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기호들의 재구성이 뜻을 가지게 하고 마치 비문을 연상시킨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로 <친구를 위한 기념비>를 읽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의인화된 마스크의 나열로 전쟁의 체험과 회상을 죽은 친구에 대한 추도의 방법인 상형의 기념비이며 문자라기 보다는 조형언어이다. 이 기념비의 언어들은 매우 상징적이고 조형적으로 압축된 형상들이 수직구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형상은 원생(原生)의 강렬한 상상력(想像力)을 느끼며 토템의 우상(偶像)과 예술의 원초단계를 감지하게 된다. 이것은 읽는 기념비가 아니라 느끼는 기념비이다.


<묵상(默想)(1978)>(도판53,54,55) 짙은 남빛을 배경으로 중첩하여 수직으로 세워진 흰 상형(象形)의 기념비 같은 <묵상(默想)>은 종교적인 숭고한 정신을 연상케 한다. 남관은 60년대에 이미 <공포(1967)>(도판25), <독백(1967)>(도판26), <정(靜)(1968)>(도판30) 등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 <묵상>에서 또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파리시대의 <공포>가 거칠고 힘찬 남성적인 마스크인 반면 이 작품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좌우대칭의 마스크 형상이다. 이와 같은 제목은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와 관련된 것이고, 또 한편 작가의 정신 내지는 심리적인 현실도피 경향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희로애락이라는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과 그 역사가 결국 허무하다는 작가의 인생관 내지는 세계관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구성은 다원적인 것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작품은 우선 구축적인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신라시대의 금관모양(도판102)을 연상케 하며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그림이 보이는 큰 형상 안에서 여러 작은 형상이 조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상들은 환상적인 상형의 모습으로 되어 있어 주술적인 면도 보여 한국의 무당 모습을 조형 한 듯 하기도 하다. 이 무렵 남관은 한국의 전통적인 형태에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작품경향과 조심스럽게 결합하는 형상을 띄우며 한국 조형예술의 전통을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대화절규(1979)>(도판57)는 1979년 서울의 현대화랑 초대전에 전시되었다. 수많은 기괴한 인간의 탈이 집합되어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이러한 탈들은 원시인들에서 볼 수 있는 것, 또는 사자의 유골이나 잔해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기괴한 형상들은 하나 하나가 독특한 모습과 영상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양한 인종을 생각할 수도 있고 그 세계를 연상할 수도 있으며, 또한 그들의 역사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기괴한 상들이 부상되었고, 표현은 단조로운 색조로 다양한 색채를 억제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작품 <흰공간(1979)>(도판56)도 같은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작품의 주제의 '대화' 처럼 모든 탈들이 그 무엇인가를 열심히 호소하는 듯 하기도 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이들의 여러 가지 사연, 풀지 못한 한고민갈등 등처럼 이 대화는 결론이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상태이다. 남관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세계를 고발하고 있으며, 전쟁을 체험하였고 오직 예술로서 살아가는 한 작가의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의 세계관임을 알려 주고 있다. 심오한 인간관과 철학까지도 생각하게 하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공포감을 준다. 또한 변모된 인간상을 통하여 예술작품으로 은유적인 뜻을 나타내 보인다는 점에서 작가의 창조적 표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80년대에는 긴장이 이완되어 환상적 분위기와 인간상들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가면극의 꼭두각시, 동화 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모습과 환상적인 색채공간을 표현한다.


<환상봄(1980)>(도판61)은 환상적인 형태의 인간상이 밝고 경쾌한 색채로 동적이고 추상적이다. 작품의 주제가 뜻하듯이 봄의 생기를 연상시키는 영상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밝고 가벼운 청색이 단조로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봄의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회고전은 한국근대사와 더불어 시작한 남관의 현대미술에 대한 일반의 몰이해에 상관 않고 끊임없이 지속해온 실험정신의 구가였다. 그의 작품은 다소 해학적이면서 보다 환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잿빛속의 상(1981)>(도판64)은 <밤율동(1981)>(도판65), <흑과 백의 율동(1981)>(도판66)들은 상형을 전자로 구성한 것으로 흑색으로만 표현되어, 마스크와 상형문자의 융합된 형상이 동양의 서예 같기도 하여 한층 단순화되어 가고 있다.


<내 마음에 비친 일그러진 상들(시리즈)(1981)>(도판67)은 10호 캔버스 여러장을 연결한 것으로 처음부터 명제를 정해놓고 제작을 한 것으로 처음에는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하나씩 그려가려는 착상(着想)을 했었다고 한다. 검은색으로 그려진 마스크의 선이 상형문자의 필획처럼 뚜렷해 졌다. 따라서 흰바탕에 검은 마스크의 형태가 더 뚜렷이 드러난다. 그 필획에서는 서예, 글씨 획의 분위기는 화면에서 추구해 가는 형태가 마스크에서 상형문자와 같은 조형언어로 연결된다. 상형문자처럼 형태가 기호화하는 마스크는 결국 은(殷)시대의 청동기(靑銅器)의 무늬 같은 형태를 연상시키기도 하며, 갑골문자의 어떤 모양을 회화적으로 처리한 것 같은 형상을 느끼게도 한다. 그리고 그 동안 남관은 그런 형태들에 청색, 혹은 갈색계통을 주조로 한 색채들을 많이 써 왔다. 그런 일련의 작품들과 더불어 묵필처럼 글씨의 검은 획으로 그리는 몇 점의 대작이다. 각개의 부분들이 따로따로 제작되나 이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체성으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을 상징하는데 그 세계성이 부여되고 있다. 이러한 조립적인 회화는 1984년 <흑백상>(도판79) 시리즈로 또 1990년 <고대의 인상>(도판87,88)에서 나타나게 된다.


<흑과 백의 율동(1981)>(도판66)은 남관의 추상 예술의 의미가 전후 파리의 앵포르멜 영향하에서 서양의 유화 매체를 동양 전통의 정신세계로 융합했다는 것을 이 작품의 서예적 추상의 형상적 이미지에서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상적 기호는 옛 문명의 잔상이나 상형문자와 같은 기호적 느낌은 자유로운 필치와 재료의 자발성에 의한 무질서한 형상의 움직임이 음악적 리듬감의 주며 회화적 요소를 순수한 조형적 모티브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염(念)(1982)>(도판70)은 전통적인 서예형식을 보여주며 표현형식과 기법, 재질에 있어 일종의 전환을 보여주는데, 서양화라는 지역적인 예술의 한계를 무시하고 예술이라는 개념 속에서 자신의 창작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염(念)>은 <태고의 염(念)(1980)>(도판63)과 함께 파리의 화실에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주제인 염(念)보다도 남관 자신의 염(念)을 보다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전시(展示)되는 미술이기보다 어떤 의식(儀式)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의 예술발상의 기조로 보이는 어떤 귀족성(貴族性)에 대한 신앙 같은 것을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모두가 어떤 형식을 우선하는 그 자체의 존재가 그의 관심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미술은 「보이는 것」이기보다「우러러보는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띄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술을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서의 자율적인 면에서 이해한다기보다, 미술을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며, 상대적으로 서양에서 싸워온 동양인이 그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그로서의 유일한 가치인 셈이다. 거듭 말하여 남관 예술의 표지(標識)인 「동양적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염(念)>이나 <태고의 염(念)>이 이러한 형상의 대표적인 제어단위로서, 이것들이 모여서 어떤 집합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변환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그의 화면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조형적인 외모와 정신적인 의미부여가 공존하는 이상으로 의식에 가까운 것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가령 여기서 우리는 신라의 금관을 연상케 됨은 이 때문이다. 또한 <달과 환상(幻想)(1980)>(도판62)에서 소멸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음도 상대적이다. 그리고 <폐왕(廢王)의 환상(幻想)(1979)>(도판58), <꼴라쥬(1980)>(도판60), <회고(1983)>(도판71,72)에선 화려한 기법의 의식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의 형성(1983)>(도판73)은 청색이 지배하는 단색조의 작품에 복잡하게 형성된 사람의 잔해와 같은 상이 보인다. 청색조의 채색은 밝고 생동적이라 하겠지만 얼룩진 회화적인 상이 꿈속에서 발현하듯이 나타나, 사자의 혼을 보는 듯한 그림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채색과정에서 물감을 칠하는 대신 흘리거나 뿜어서 색을 흩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대상 없이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인간성을 구상하여 하나의 형성형태를 만들고 있으나, 새로운 형태의 구축성이 보여지고 있다.


<가을의 환상(1984)>(도판74)은 다채로운 색채의 작품으로 청색의 변화 있는 바탕에 노란, 빨강, 녹색이 화면을 활기 있고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날의 어두운 영상들은 사라지고 생기 있고 동적인 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정적인 세계관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남관의 인생관과 예술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달과 삐에로(1985)>(도판77)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유명한 작가의 말련의 단계가 그러하듯이 남관 또한 유희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1982년에 이미 <삐에로>(도판70)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제작한 바도 있지만 이 작품 이후로도 1990년 생을 마칠때까지 <삐에로 가족>(도판78,84,85,86)이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많이 제작하여 지금까지의 남관의 전형적인 형상인 마스크, 상형문자를 형상화 한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삐에로라는 인간을 통해 한층 다채로운 색채와 우주적인 신비, 그리고 얼룩의 반점등으로 동양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흑백상(1986)>(도판79)시리즈는 대작으로 남관의 전형적인 형상인 마스크의 형상이 더욱 단순화되어 밀도 있고 상징적인 느낌을 주며 굵고 각진 테두리가 흰 바탕과 대조를 이룬다. 천태만상의 인간상의 <흑백상>시리즈는 남관의 창작 50년을 결산하는 만년의 작품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후 이와 같은 작품경향의 <구각된 상(1988)>(도판81), <고대의 인상(1990)>(도판86,87) 등으로 동양적이며 명상적인 또하나의 새로운 예술세계를 표현하였다.


생애의 모든 정열을 창작에만 몰두한 남관은 비극적 체험을 천태만상의 인간형상인 기호적 문자추상으로 표현하였으며,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정서의 형과 색으로 다양한 변화를 표현하였다. 때로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허탈한 형상의 세계는 색채와 더불어 화려함, 엄숙함, 경괘감 등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노화가의 정력적인 작품활동은 작품세계에서 볼 수 있듯이 일관되나 깊이 있는 탐구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구도자 같은 남관의 생활은 더욱더 명상적이며 엄숙한 동양적이며, 우주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4) 드로잉


드로잉은 예술가들의 창조력의 원천으로서, 또 예술정신의 집약으로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현대미술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화두가 부각되면서 새롭게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은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의 다양한 재료들이 표현되고 있으나 조형예술의 기본단계인 드로잉을 제작해 오고 있다. 드로잉은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항구적인 작품들과는 달리 새로운 표현기법을 자유롭게 실험해 볼 수 있으며, 예술적 관념의 변화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기 앞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데 필요한 창작단계의 한 과정으로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 예술가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룩한 예술작업을 일부 작품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미술사적으로 평가함에 있어 독창적인 세계를 설명하고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영향을 받았던 예술가, 경향 그리고 감수성 등 그의 작품세계를 가능하게 한 모든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드로잉은 예술가들이 순간순간 떠오르는 작품에 대한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기록으로 실제로 완성된 작품들보다 오히려 예술가의 본래 의도나 화력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 추상화의 선각자로 불리는 남관이 자신을 추상화가가 아니라고 자주 언급한 것은 하나의 현대미술사조에 자신을 얽매이기 보다 독자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 예술가의 독백이었다. 이에 관한 구체적 증거가 바로 드로잉으로 그의 많은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추상적인 공간과 함께 인간이 등장하면서 추상과 구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이다.


남관의 드로잉은 동양화 붓이나 싸인펜, 연필 등으로 그린 얼굴들과 마스크, 인물 군상들이 있고, 파리 풍경을 그렸다. 또한 우연한 효과를 실험한 앵포르멜 작법과 도안화된 얼굴 스케치가 있으며, 판화 작품이나 유화의 밑그림처럼 보이는 상형문자 추상화도 보인다. 그의 드로잉은 습작이 아닌 완성된 작품처럼 보인다. 그것은 연습장이나 투박한 종이에 낙서처럼 그려진 습작에서조차 높은 완성도를 느끼지게 하며, 순간적 힘의 배출과 완벽한 화면 구성에서 독립된 예술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드로잉은 덧칠하지 않는다는 서체와 같은 성격으로 유화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예술세계이다.(도판89-95)


재현적 배경이 아닌 드로잉의 순수한 표면은 마음의 거울처럼 비쳐지는 배경이며. 무한대의 공간 표현이다. 또한 드로잉의 배경이 되는 상형 문자와 같은 변형된 사각형의 구축 공간은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 풍경처럼 보이는 드로잉의 배경과 상형문자로 구축된 초월적 공간 속에 민간이나 동식물의 이미지 형상이 없다면 그의 드로잉은 완벽한 추상표현주의 회화이다. 드로잉의 배경은 유화와 달리 두터운 마티에르가 없어 감정 노출이 즉흥적으로 일어난다. 겹쳐진 색조의 변화가 많으며. 푸른색과 붉은 자주색, 그리고 흰색의 여백은 색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려는 평면적 추상회화이다. 배경에 등장한 상형문자 형태, 역시 드로잉에서는 순수한 색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평면인 것이다.(도판96,97)


이러한 바탕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13년간 파리에서 작업하면서 형성된다. 변형된 인상주의 화풍으로 인물을 그렸던 그에게 서구 추상미술은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남관의 드로잉은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비정형의 추상화에서 시작되면서 동시에 추상화에서 탈출하는 출발점이 된다. 경계선과 구속된 틀이 없는 드로잉은 때로 표면의 질감과 마티에르 기법이 생략되어 캔버스에서 보여준 추상표현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나 드로잉은 실험적 추상표현의 배경과 함께 구체적 형상이 그려지면서 비대상화(非對象畵)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남관은 아득한 옛날 우주창조 의 당시로 돌아가 근본 되는 어떤 힘의 형태를 느끼고 싶어 그림의 모티브보다 더 중요한 불, 물, 공기의 근원적 힘의 표현을 길가에 채이는 이끼 낀 돌 위에서도 사람의 얼굴들을 보았고 이끼와 같은 푸른 색조의 얼룩에서도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휴머니즘 예술을 드로잉에서 실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적 그리움과 고국을 생각하게 하는 파리 시기의 드로잉은 추상 미술의 주류에서 벗어나지만 휴머니즘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결국 남관의 예술세계는 국제적 양식의 앵포르멜 미술보다 더 인간 중심의 삶을 담고자 하였던 것으로 해석되며. 작가는 미(美)의 자유스러운 표현으로 드로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2) 남관 예술의 특징


(1)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을 과거로부터의 자기를 되찾아 장래를 향하여 앞서가면서, 순간을 두고 결의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본래적인 실존이며 또한 인간이 존재 그 자체의 밝음 쪽으로 나가는 것이 실존이라고 하였다. 또한 야스퍼스의 「철학」에 의하면 실존은 결코 객관이 될 수 없는 것,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고하는 행동하는 근원, 자기 자신과 관계되며 또한 그 자체 안에서 초월자와 관계되는 것이고, 자기에게 만족할 수 없고 여러 가지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스스로의 유한성에 절망하며, 거기에서 초월자가 주재하는 진정한 현실에 눈을 돌려서 본래의 자기존재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비인간성과 소외에 대한 반성을 나타난 실존주의는 비단 철학에서만 탐구된 과제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실존은 역사적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미술에서도 나타나는데, 앵포르멜은 포트리에, 마티유, 볼스 등과 같은 주요한 작가들과 이와 유사한 풍으로 여겨지던 일군의 작가를 규합하는 실존에 대한 새로운 미술경향으로 나타났다. 앵포르멜의 미술사적 배경은 두차례의 전쟁을 체험하고 그 체험에 의한 존재의 불안을 느꼈을 남관에게 특히,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체험한 비참한 인간상을 표현한 포트리에의 <인질>(도판98)시리즈는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는 남관 예술의 특징으로 나타나며, 남관은 인간 본질의 완성을 위해 당시의 상황을 회상, 인식,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인간상을 예술로서 승화시키려 노력하였음을 볼 수 있다.


남관이 추구해온 작품은 표면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닌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의 극복과 본질의 추구라고 할 수 있는 내면세계의 표현이다.


2차 세계대전시의 폭격에 뒤따른 도쿄의 참상과 625전쟁 때 서울에서 겪은 수많은 사람의 비참한 죽음과 파괴, 그리고 구사일생의 생존체험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섭고,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전란 속에서의 죽음과 삶의 처절한 참극은 남관의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정신적인 충격과 상처가 된 것이다. 이러한 기억들은 자신의 쓰라린 경험,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의 기록으로서 단순한 모방이 아닌 전후 파리에서 성행하던 필연적인 앵포르멜로 연결되었다. 형상이 완전히 붕괴된 질료감 및 거친 표면으로 상징되는 앵포르멜 회화는 그의 작품의 실존으로서 미술의 본질이 인간상의 모색이라는 「내면세계」의 추구로 결론지어 진 것이다. 또한 남관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재는 내면적인 것. 사람들은 나를 추상화가로 규정 지워서 말하는데 나는 늘 그 점에 불만을 말한 일이 있다. 오랜 서구(西歐)생활은 나를 한층 더 동양인 한국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래서 내면에 축적(蓄積)된 문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문제(슬픔, 고통, 갈등)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캔버스를 펼쳐 놓고 일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소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흔적>, <허물어진 고적(古跡)>, <고고학실인상(考古學室印象)>, <동양의 환상(幻想)> 다만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다. 나의 내면세계를 그린 것이다. 그 과정은 추상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표현된 것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사실이다. 그것이 비록 꿈이나 환상(幻想)에 기인된다고 할지라도 화가가 붓을 들고 화폭(畵幅)에 옮겼을 때는 벌써 그 자체의 선이나 색이 구체성을 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작업을 대중이 이해하려면 많은 노력과 지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화면에는 자연계에 있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다른 또 하나의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추상화가가 아니라 구상화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문제에 집중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있는, 혹은 이미 죽어 있는 모습의 것이다. 한국동란 중에 아주 처절한 체험을 겪은 그는 전쟁 중 도처에서 목격한 죽은 병사들의 얼굴과 이끼 낀 돌 그리고 고궁의 돌담에서 역사를 발견하였으며 이러한 기억들은 가면을 쓴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게 된다.


잠이 안 오는 밤, 눈을 감고 누워서 온갖 기억들이 끊어진 필름처럼 머리 속을 오가는 경험은 누가나 하였을 것이다. 나의 그림은 그러한 현실과 꿈, 기억과의 만남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젊은 시절에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내 그림의 모티브는 자주 전쟁의 기억에서 나온다. 벌판에 쓰러진 젊은 병사의 얼굴, 토막나 뒹구는 팔다리, 시체 위로 쏟아지는 햇볕,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모습… 얼굴 얼굴들을 나는 길가다 가 땅위에 구르는 이끼 낀 돌 위에서도 보고, 고궁(古宮)의 퇴색한 돌담 위에서도 본다. 나는 돌에서 참 낳은 역사를 본다. 태고적부터 비바람에 씻기고 닳고 버려져서 지금에 있고 또 미래에도 남을 돌과 온갖 풍상을 겪고도 살아 남는 인간의 얼굴이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 이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얼굴이다. 때때로 어떤 현상과 만날 때 나타나는 기억들을 뽑아내서 마치 가면(假面)을 쓴 듯한 인간의 얼굴을 그리게 된다.


주검의 한 부위에서 생명의 새로운 고동을 느낀 의식의 심연을 사실적인 재현으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추상의 방식을 택하게 된 이유이며 그러한 입장은 그의 회화가 결코 절망과 좌절만을 토로하는 허무주의가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기도 하다.


나는 표면에 나타나는 아름다움 같은 것은 싫어합니다. 깨끗하거나 치장된 것보다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만개한 싱싱한 꽃보다는 벌레 먹은 꽃을 더 좋아합니다…자코메티의 조각을 보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육체를 보이고 있지요.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상, 굉장히 비참한 인간상입니다만… 내 작품의 주역은 언제나 인간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인간상입니다. 이는 625 전쟁을 겪고 나서 뚜렷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인간 속에 있는 생명의 영원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남관은 자신이 체험한 비극적인 현실을 어느 한 시대의 역사, 또는 우리 민족이 겪은 한때의 비운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인간세계 내지는 삶의 세계에 무상하게 상존하는 모순과 갈등, 한과 미련의 현실로 전이시켰다. 이러한 그의 예술적인 현실에는 생(生)의 부정적인 면뿐만이 아니고 긍적적인 삶의 의욕에 대한 찬사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남관을 당황스럽게 하였던 것은 물체의 아름다움보다도 비극적인 시련을 견디어 낸 차원의 인간상이었다. 남관은 장 쟈크 레베크에게 자신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게는 완전한 형태나 피부를 가진 것보다 그 내포(內包)된 생명-즉 본질과 의의가 문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극히 통속적인 아름다운 것보다는 잔혹한 고비를 넘어온 인간상- 그와 같은 잔혹한 경지를 겪으면서도 자기 외의 어떤 커다란 힘, 즉 신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악착같이 생을 이어나가려는 이런 인간상-이 한층 더 나를 유혹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가 인간 세계에서 발견한 것은 번뇌도 없고 고통도 없는 세상에의 아쉬움, 선과 악의 대립이 없는 인간에의 아쉬움, 삶의 절망 속에 남아 있는 정(情)등이다. 바로 이러한 그의 발견이 비극과 비운의 숙명적인 인생을 예술로 승화하게 한 것이다. 즉 비극을 이겨내는 인간의 모습 등이 그의 예술의 대상이고 그것이 또한 예술미로 승화된다. 즉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변화무쌍한 세계에 대한 불신에서 벗어나 항구적이고 영구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 및 삶에 대한 남관의 인식이 어떤 것이었나를 말해주는 것으로 남관은 인간역사의 흔적, 태고의 신비를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돌을 통해 작품에 장승, 탈, 적 등 다양한 한국의 전통적 형태를 작품에 표상하였던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인체를 모델로 직립(直立) 존재로서의 인간의 인식세계를 새롭게 조명해 보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언어기능을 인간 자신의 생체기능으로부터 재조명하여 70대 후반부터 동양적이며 우주적인 명상의 단계로 확장되어 영원성을 표현하였으며, 또한 유희적인 인간상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2) 기호화된 인간형상


기호화된 인간형상은 마스크와 상형문자의 형태로 남관 예술의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마스크와 상형문자의 형태는 60년대 말경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남관의 말에 의하면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갑골문자' 같은 것을 더 변형시키면 마스크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관은 파리에 도착하여 전시회를 통해 많은 인상을 받았다. 그중 클레의 작품은 충격적 계시로 다가왔고 클레의 작품에 나타난 기호와 같이 단순한 점에서 마스크를,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식물을 기호화 한 그림문자의 작품에서 상형문자를 생각해 내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전쟁중의 보았던 수많은 시체의 비극적인 인간 그리고 성장지 안동의 하회탈 등 한국전통예술인 탈, 장승, 금관 등이 남관의 잠재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것은 독자적인 형상인 마스크로 형상화되었고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세대인 점에서 한자의 형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천태만상의 기호화된 인간형상은 눈, 코, 입들이 제자리에 붙어있지 않고 비틀어져 있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간상 또는 얼굴(마스크)들이 귀국 후에는 반드시 상처의 자국,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신음하다가 태양 광선에 노출되면서 비극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 동강이 난 인체, 또는 비뚤어진 얼굴들은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주술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듯이 보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주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삶의 공간은 때로는 다채롭고도 현란한 색채의 축제를 펼쳐 보이고 있기도 한 것이다.


남관은 자신을 추상화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관의 예술이 구상에서 추상적인 작업으로 변화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세잔의 분석적 회화론을 접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를 전달할 수 있는 자신의 독창적인 방식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 추상화된 구상화이기 때문이다. 즉 구상에서 비구상 회화로의 단계과정의 변화는 다름 아닌 내면화의 탐구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의 글에서 남관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나를 추상화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몇 천년을 내려온 나의 고국의 오랜 주제들 이를테면 돌, 고대의 유품, 데드 마스크, 옛 식물무늬 따위와 같은 옛 문명의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대적인 묘법으로 옮기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이러한 묘법이 낯설어 신비스럽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관의 복합적이며 혹은 집중적으로 추구되었던 내밀한 비구상(非具象)의 작품의도는, 특히 <마스크>에 나타나는 진실 추구로 이해할 수 있다. 곧 남관은 625 전쟁의 비극과 참상의 체험을 인간과 어떤 상황의 피상적인 공포로 파악하기보다는 내면과 본질의 엄숙한 실상을 상징적으로 시각화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가면은 나의 625동란 때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어요. 625때 나는 죽을 뻔했었어요. 실지로 죽었다는 소문이 나서, 그것이 반대로 나를 살려준 결과가 된 것이지만요. 그때 나는 흑석동에 화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강가에서의 치열한 격전으로 화실이 폭격을 당해 지붕이 뚫어졌습니다. 다행히 나는 다치지는 않았지요. 그때 그 전쟁 속에서 한강물위로 죽은 사람의 새까만 얼굴이 떠내려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그후 14후퇴 때, 「종군화가단」에서 홍천(洪川)도하작전을 스케치하러 간 일이 있었어요. 51년 2월인데, 그해 왜 눈이 많이 왔지요? 눈오기 전에 폭격으로 까맣게 타 죽은 적군의 시체가 눈 속에 파묻혔다가 눈이 조금씩 녹으니까, 그 얼굴이 나오고 손도 나오고 하는데 그 까만 얼굴이 처음엔 싫더니, 그걸 매일 보니까 아름답게 느껴져요. …눈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까만 얼굴들을 날마다 보았지요. … 자연을 관조하는 작가의 눈이, 그 눈은 마음속의 눈이 아니겠어요. 그 눈이 어떤 이미지들을 발견해 갑니다. 그 원리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 아닙니까. 추상작품을 한다고 해도 작가는 결국 마음속에 있는 것을 「사실(事實)」하는 거죠. … 되어 가는 작품은 그 과정에서 변화를 해갑니다.…그러니까 마스크나 상형문자도 그런 걸 해보겠다고 의식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나의 생활에 축적돼 있는(경험) 무제가 캔버스에 형상 되어 나오는 거죠.


이러한 내면의 상징화는 남관의 예술세계가 현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원성을 지향하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기력해지는 현장에선 보다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문제로부터 예술을 생각하게 된다는 남관의 예술표지가 곧 마스크인 것이다. 따라서 남관의 예술적 관심은 어떤 실체로부터 유발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 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감각되는 세계에는 실재성은 없지만 형상의 세계는 실재한다는 것으로 그의 마스크는 인간의 인식의 근본적 원형 같은 것으로 원생의 정적이 배어있는 성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남관의 사방형적인 구축세계는, 서도(書道)의 획을 연상시키는 단위들이 꼴라주의 기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이것이 전체상이 상형의 구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나타나. 우리는 이 해독할 수 없는 상형에서 또 다른 표상(表象)을 연상케 되는데, 천하대장군의 머리부분 또는 한국고유의 「탈」의 표정이 이중사(二重寫) 된다는 것이다. 가면이란, 본상이 아니라 그것을 덮어 감추는 문자 그대로의 탈을 가리킨다. 이것은 문명이 하나의 허구임을 은유 할 수도 있으며, 남관은 인간의 허구성을 이러한 작품을 통해 고발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관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풀어갈 열쇠가 될 기호이미지는 초기의 화면에서는 올오버로 뒤덮인 풍경의 편린으로 나타나고 후기에는 압축된 기호형상으로 나타난다. 전쟁에 의해 초래된 철저한 파괴와 죽음이 그에게 순간적 생명을 초월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희구를 강화시켜 준 것으로 순간적 아름다움이나 생명이 맞게될 죽음이나 추함에 대한 반역적 반응으로 영구성에 대한 희구가 한 민족의 집단적 체험이 얽혀있는 문화유산에 접맥되었을 때, 선사시대의 고분이나 역사적 유물들을 연상시키는 풍경적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그의 심연에 잠재된 아픔의 원천을 이루는 편린들로서, 전쟁에서 얻은 아픔, 끝없이 고향을 떠나 보헤미안으로서 자기탐색의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애증이나 그리움은 회상 속에서 추도의 양식으로 표백된 듯 하나의 기호적 상형으로 압축되고 주술적 능력이라도 발할 듯한 부적(도판103)이나 비문 속의 기호로서 되살아나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유물들과 절연되지 않은 채 퇴색하고 빛 바랜 유물의 한 조각으로, 각인 된 문자로, 가면극에 등장하는 마스크(도판105)로,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형으로서의 인간상들이며, 한결같이 생명을 지녔다가 쓰러져 가는 찰나적 존재로서나 아닌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무시간적 존재들인 것이다.


남관의 기호적 인간형상의 마스크와 상형문자의 형상을 한 작품을 살펴보면, 남관은 파리의 망통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차지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도판24)과 같은 동양적인 정신과 서양적인 기법으로 전쟁 중에 처참하게 죽어간 인간들의 회상과 추도의 마음을 생명의 영원성을 표현한 단층적인 심상추상으로 표현하였다. 1960초에 상형문자의 암시적인 형상이 드러나며,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공포>(도판25), <독백>(도판26)등의 작품에서 전쟁중에 체험한 흰 눈속에서 나타난 까만 얼굴의 기억을 장승(도판104) 또는 한국의 탈(도판105)의 형상과 유사한 세월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모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종교적인 숭고한 정신을 연상케 하는 좌우대칭의 마스크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큰 형상 안에서 여러 작은 형상이 조형되어 주술적인 면도 보여 한국의 지석묘(도판101)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남관은 마스크의 형상에 한국 조형예술의 전통을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


또한 남관은 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한국적 의상의 빛인 향수 어린 남빛 바탕 위에 한국적인 글자 같은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한국인의 문화와 그 역사, 그리고 가치를 예술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1977-8년대 <묵상>에서는 어떤 의식에 부여된 형식처럼 더욱 드러난 대상성으로 인해 신라의 금관(도판102)과 사람의 모습 그리고 부적(도판103) 같은 한국전통의 다양한 조형예술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화(1975)>(도판49)에서는 회화적으로 의인화된 기호의 한 쌍이 인간화단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80년대부터 보다 구체적인 모습의 가면극이 꼭두각시, 동화 속의 주인공들과 같은 형상이 <삐에로>(도판69), <회고(1983)>(도판71,72), <삐에로 가족(1990)>(도판84-86)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제작하여 지금까지의 남관의 전형적인 형상인 마스크, 상형문자의 형상이 한층 다채로운 색채와 우주적인 신비, 그리고 얼룩의 반점등으로 동양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유희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회고>에 나타난 우주적인 공간을 암시하는 달, 별과 같은 형상은 남관이 어렸을 때 읽었다는 노자와 장자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우주적이며 유희적이며 동양의 정신을 형상화 한 것이다.


오직 예술로서 살다 간 남관의 심오한 인간관과 철학까지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모된 인간상을 통하여 예술작품으로 은유적인 뜻을 나타내는 창조적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서양의 유화 매체를 동양 전통의 정신세계가 담겨진 서예적 추상의 형상을 보여주는 <흑과 백의 율동>(도판66)의 작품에서 옛 문명의 잔상이나 상형문자를 무질서한 형상으로 표현하여 회화적 요소를 순수한 조형적 모티브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검은색으로 그려진 마스크의 선이 상형문자의 필획처럼 뚜렷해져 흰바탕에 검은 마스크의 형태가 상형문자와 같은 조형언어로 연결됨을 볼 수 있다. <흑백상>(도판79)시리즈는 남관의 창작 50년을 결산하는 만년의 작품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후 <구각된 상(1988)>(도판82), <고대의 인상(1990)>(도판87,88) 등에서 또하나의 새로운 예술세계를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남관예술의 특징인 기호적 인간형상으로 표현된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작품의 형상과 의미내용이 결합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양적인 기호의 나열에 의해 공간구성의 평면성은 남관의 예술세계가 동양문화권의 문화적 전통이 본질이라 볼 수 있겠다.


(3) 꼴라주의 다중적 재질감의 마티에르


독특한 남관 세계의 추상적인 조형 수법은 1960년을 전후해서부터 그가 손대기 시작하였던, 주로 종이를 이용한 물질적 구조의 꼴라주 작업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현대적 방법이 파리에서 남관에게도 수용되다가 그 방법을 역이용함으로서 기묘한 형상 효과의 평면적인 꼴라주 흔적만 생성시키고, 그 위와 주위에 자유로운 색상을 부여하는 등의 다중적인 표현형상을 성립시키는 독자적 착상을 실현시켰다. 끝없는 실험정신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즉 캔버스에 조형적 계산으로 찢어 붙였던 색상 표현 속에서 붙여졌단 상태의 형적만 남게 제거하고, 다시 그 형적 부분에 색상을 넣어 화면 전체가 특이한 조화를 이루게 하는 등의 매혹적인 착상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데꼴라주 또는 네거티브한 꼴라주 작업의 성격으로서, 붙여졌던 물질이 제거되면서 생성된 영상이 결국 꼴라주 형상의 시각적 주상(主像)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애초의 꼴라주 작업의 물질감을 그대로 느끼게 함으로써 시각적으로는 3차원적인 화면 효과를 조성케 한 그 초기의 작례를 우리는 1965년 전후 시기의 <역사의 흔적(1963)>(도판21), <허물어진 고적(古蹟)(1964)>(도판22), <동양의 환상(1972)>(도판37)등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들 속에 시각적 꼴라주 형상들은 작품에 따라 일종의 기호성, 그밖에 신비한 물상(物象) 형태로 구체성을 갖게 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내밀한 표상미를 조성시켰다. 이들 작품에서 보이는 유채의 독특한 질감 처리는 꼴라주 된 형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한편, 화면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 70년작의 작품에는 <꼴라주=아쌍블라지>(도판59)라는 표제가 있었으며, <릴리프=꼴라주>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꼴라주는 20세기초 입체파가 시도했던 파피에콜레 기법을 발전시킨, 표현상의 물질, 또는 오브제 의식이라는 것의 표현으로 입체파가 추상적인 선맥만으로 화면을 해체한 후, 여기에 일상적인 현실감의 물질인 신문지, 라벨, 차표 심지어는 모래나 철사들을 접착제를 사용해서 첨가시킨 것이 원형이라고 하겠다. 회화표현에서 포름을 배제하면, 남는 것은 캔버스 표면의 안료뿐이며, 이러한 물질적인 것에 대하여 현대회화는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이었다. 이른바 마티에르의 의식인 것이다. 50년대초 파리 화단은 「뜨거운 추상」이라는 미술 논쟁의 격변기를 겪으며, 타피에(Michel Tapie)의 「또 하나의 미술」이, 포트리에(Jean Fautrier), 뒤뷔페(Jean Dubuffet)등이 대표하는 「마티에르가 그 이미지를 자유롭게 형성하는 바로 그 순간」을 표현하려는 현대적 경향의 회화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의한 유럽의 기존질서가 와해되었다는 것과, 원초회귀로서의 물질관을 들 수 있다. 보링거(Wilhelm Worringer)식으로 말하면, 합리주의적 감정이 지(知)를 대신하는 궁극적인 체관(諦觀)이 각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구미작가들은 뿌리고 흘리며 문지르고 긁고 할퀴며 뚫기까지 했었다. 물질은, 신체적인 액션을 통해 인간화에로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관의 「꼴라주」는 이들과는 다르다. 서체의 획을 연상시키는 그의 꼴라주는 물(物) 자체라기보다, 어떤 영상(影像)을 구성하기 위한 제어 단위로서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관의 서도(書道) 문화권에서 생성한 문화적 인과와 상맥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점이 유럽의 추상화가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표지(標識)인 것이었다.


남관의「꼴라주」는 당시의 파리 화단에선 독특한 추상화였으며, 동양의 표지를 응용했던 술라주(Pierre Soulages), 아르퉁(Hans Hartung)의 화면과는 그 발상의 추이(推移)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파리 화단의 미술여론이 이러한 남관의 표지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은 여론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파리였기 때문이다. 통속적으로 보면, 파리는 여전히 텃세가 심했다는 것이며, 파리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던, 한국의 한 작가에 대해서 어떤 예비지식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관의 미술이 정적인 화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역동성을 가지는 것은 역시 매체와 기법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안료의 물리적 특성과 저항력의 숙달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어떻게 자신의 미의식과 표현충동을 매개하여 현상적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남관이 주로 사용하는 색채와 질감에서도 이 같은 요소가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여러번의 중첩과 반복을 통해서 나온 깊이 있는 색들을 즐겨 사용한다. 그런 만큼 장식적이고 가벼운 색깔보다는 깊숙하고 구수한 맛이 진하게 풍긴다. 재료와의 끈질긴 대결구도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무한한 시간과 노동력을 요구하는 반복적인 과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대부분의 표면에는 작가의 체취가 배어 있으며 다분히 촉감적이다. 이러한 것은 깊이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물질과의 교감을 통해 또 다른 그 무엇으로의 승화를 지향하는 고도의 정신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화면은 초기에 보이는 인상파나 야수파의 색채적 인상이나 센티멘탈한 감성의 드러냄이 보다 구축적 조형세계로 변모하여 그의 회화세계의 고유성을 확고히 제시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앵포르멜의 작가로서 현대의 참혹한 인간상을 보여주었던 포트리에의 작품(도판99)에는 물질성의 강조와 비통하게 짓이겨진 인간의 모습을 통해 문명비판적 의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에 비해 남관의 작품에서는 물감의 마티에르가 지닌 물성은 최대한 억눌려 상형적 이미지와 미묘한 긴장 속에 용해되어 있다. 물성의 드러냄이나 작가의 의식적 표현전달이 아닌 가락으로 잔잔히 울려 퍼지는 서정시로 순화되어 있는 것이다.


꼴라주 기법이 모노타입기법과 동시에 채용되는가 하면 아쌍블라쥬기법이 시도되기도 하여 그의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엿보인다.(도판59,60,68,80) <폐왕의 환상>(도판58)에서는 여러 가지 폐품을 이용해 폐왕의 이미지를 비극적이라기보다는 희화화시킨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합판에 폐품을 꼴라주한 작품으로 폐왕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필름 포장지, 약포장지 등 잡다한 오브제 등을 꼴라주하고 드리핑(dripping), 데칼코마니(decalcomanie)등의 기법을 혼합적으로 폭넓게 사용하여 원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남관은 추상회화의 표현 기법 또는 재료와 마티에르 자체가 그의 회화 세계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발묵의 우연적인 공간에 마아블링, 드리핑, 타시즘등의 병행은 꼴라주를 한층 다양하게 하여 독자적인 작품을 형성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큰 붓자국이 물감 그 자체의 자발성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여 물감이 번지고 튕겨짐을 보게된다(도판64,65). 겹치는 과정에서의 우연성은 남관의 밀도 있는 구성에 따라 필연적인 우연으로 바뀌어 진다. 그것은 곧 동양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섬세한 화면이 바로 끊임없는 탐구의 산물로, 꼴라주의 다양한 제작기법은 남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예술세계의 특징이라 하겠다.


(4) 동양적 신비의 색채


남관에게 있어서 색채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특히 청색은 그가 즐겨 사용하였던 색조이다. 흩뿌려지듯 투명하게 화면을 덮고 있는 푸른색은 기호로 형상화된 인간의 맑고 순수한 본질적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청색 위에 보라색, 황색, 홍색, 청록색 등의 색채조화는 동양적인 신비감과 명상을 불러일으킨다.


청색은 남관 자신의 말을 따르건대 바로 한국의 의상 빛깔이다. 본질적으로 우수가 깃든 이 빛깔은 말하자면 고국의 빛깔이자 특히 남관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관이 말한 한국의 의상 빛깔은 한국 사람들의 정서가 담긴 오방색 중 '쪽빛'을 일컫는 것 같다. '쪽빛 하늘', '쪽빛 바다'라는 말을 할만큼 쪽빛은 한국에서 푸른빛을 대표하는 색으로 한국 사람들의 정서가 담긴 색이다. 아주 옅은 옥색 혹은 하늘색에서부터 짙은 검푸른 군청색에 이르기까지 염색횟수에 따라 푸름의 정도가 매우 다양한 한국의 자연색이다.


청색은 보통 차갑고 투명한 느낌을 주며 신앙, 신비, 우수, 고요와 침묵을 상징하는데 한국인에게는 초세속적인 신앙을 의미하며 중국에서는 불멸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것은 곧 동양적 신비의 색채로 가장 대표적인 색이라 할 수 있다.


남관의 전체적인 청색의 주조적인 예술세계는 파리에서의 외로운 생활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했을 그의 예술세계를 보다 내면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게 한다. 또한 꼴라주의 다중적 재질감의 마티에르와, 절제되면서도 풍성한 색채조화는 명상적인 공간성을 불러일으킨다.


모색기부터 주조를 이루는 색은 푸른빛은 다양한 변화를 띠면서 나타나고 있다. 세잔느의 영향아래 전개된 토속적 주제들을 이루던 시기의 푸른색은 녹이 슨 구리빛 푸른색이나 검푸른 속에서 정감을 띤 빛으로 스며 나오는 빛깔이 되기도 하였고, 1967년작 <하나의 형태>(도판29)에는 안개 속에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잿빛에 가까운 검푸른색, 1974년작<푸른 반영>(도판44)에서는 묘연하게 흐려진 하늘색으로서 탁하게 화면을 덮어 각인 된 기호를 표면으로부터 후퇴시킨다. <묵상>(도판53-55)에서는 회색조를 띠면서 번져 가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남관의 색채는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인간내면세계의 꿈, 환상, 회상, 시간의 흐름 등 독창적 조형을 한국전통의 형태인 탈, 왕관, 부적, 암각화, 장승 등 우리 의식 심층을 떠올리는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남관의 회화세계는 파리 시대 이전과 이후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나타난다. 그 변화는 우선 화면을 물들이고 있는 색채에서 나타나고 있거니와 파리 시대에 있어서의 대체적으로 어둡고 응결된 듯한 '색채=마티에르'가 귀국 후에는 차츰 밝아지는 것이다. 동시에 까칠하던 마티에르가 색채속에 용해되어 화면 전체가 속으로부터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때로는 신비스러운 후광에 감싸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1970년대 초의 남관은 콜라주를 벗기기 시작했다. 가면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 화면을 가리고 있던 탈이 벗겨지면, 안료가 묻지 않은 소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밤이, 여명의 먼 빛을 받아 밝아지면서,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뜻밖의 하얀 살갗을 드러내는 현상처럼, 남관의 파리 생활에 있어서의 여명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소지(素地)는 푸른빛으로 대치되며, 신라시대 유물의 장식적인 귀족적 문양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패턴들이, 하얀 윤곽들로 빛나기 시작한다.


1980년대는 색의 자율성과 효과를 중요시하며 무한성의 깊이를 표현하였다. <잿빛속의 상>(도판64), <흑과 백의 율동>(도판66)에서처럼 동양적인 수묵화나 서예와 필획에서 흑색과 백색의 대비를, <흑백상>(도판79)시리즈에서는 비감각적인 세계를 보여주어 엄숙하고 은유적인 표상으로 동양인으로서의 흑색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남관은 색채화가라고 불리울 만큼 노련한 색채구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청색과 백색의 색조대비, 초록, 빨강, 보라빛 주조의 중간색에 의해 정교하게 시사된 분위기는 그 신비성으로 인해 고요한 전율을 동반한다.


이 화가의 완벽주의는 근본적으로 예술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적 태도와 일치된다


할 수 있다. 전통적 표준에서 비교해 볼 때, 색, 형, 공간, 명암, 광선 등의 요소들이 완벽한 화면구성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그림 넘어 표현된 감성의 세계는 때로는 청록색같이 싱싱한 생명감과 기쁨의 평화가 느껴지는 화면이 있는가 하면, 황량한 계절 속의 침묵과 깊은 명상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 같은 그림도 있다. 결국 이 화가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화가 자신의 심정토로의 장(場)이며 또한 나이와 함께 더욱 완숙된 표현에 이를 수 있는 세계이며 개성이 발휘되는 장으로서 화가의 정신적 생활 그 자체의 변화를 기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남관 화풍을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기조로 한 미묘한 색조의 하모니와 리듬으로써 형상이 전하려는 선율을 효과적으로 조성하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고색이 창연한 다갈색 혹은 암청색의 주조는 시간적 투시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번짐의 효과에 의한 공간처리가 더욱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시작하였으며, 80년대 접어들어서는 더욱 대담한 유채색의 표현과 흑색만으로 표현된 단색조의 화면을 보여주면서 다채로운 현대성의 반영에 충실하면서도 남관의 독자적인 기법을 일관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5. 남관 예술의 미술사적 위치


남관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앞으로 그의 예술생애를 총체적으로 정리, 분석하는 연구가들에 의해 거듭 정립되어질 것이다. 8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생를 마치기 직전까지 그의 예술적인 영혼은 젊은 예술가들처럼 약동하여, 화면 구성의 조형적인 치밀성과 신비성은 건강한 정신성을 수반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화가로서 남관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그의 생애는 곧 이 나라가 겪은 고난과 시련의 혼란한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우리나라가 겪은 격동기에 산 증인이며 그 시기에 태동한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에 대한 증언이자 이정표이기도 한 것이다.


국내 미술계에서 이미 확고한 중견 내지 중진작가로 위치를 굳히고 있던 30∼40대의 서양화가들 중에서 1960년 무렵까지 자기도약의 정열로 도불(渡佛)이 가능했던 작가는 파리의 체험을 통해 국내에서의 작품이나 화면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출국 전에 다짐하였던 새로운 자기 도약을 실현시키며 그 뒤의 국내의 현대미술 전개에 직접, 간접의 영향과 고무의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남관 역시 외국에 체류하여 서구 추상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감과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적 모더니즘의 정착과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의 고유한 미적 특성은 우리의 풍토와 자연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더라도 그 내면에서 드러난 정신적 풍토성은 우리 고유의 특질을 잘 반영하고 있다. 남관의 작품의 실질적인 성공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것은 논리적인 접근방법보다는 체험적인 사실과 직관에 의한 원초적 감성의 방법으로 형태를 찾아내는 방법이 그러하다. 거기에 본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품을 제작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이는 앵포르멜이 절정에 다다라 있을 무렵인 1954년부터 1968년까지 남관의 13년간의 기나긴 체불 창작생활을 경험한 작품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화면들에 신화를 환기시키는 우수적 분위기와 색조, 그리고 갑골문이나 부적(符籍)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상징성 등이 동양을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대체로 이국인들의 입장에서 예술적 성취를 결정할 만한 선택의 여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철저히 동화되어 체제국의 오리지널을 능가한 중국의 자오우키와 일본의 스가이가 있다면 남관은 무한한 자기성찰과 자기확인에 의한 차이화를 오랜 세월 동안 국외자가 됨으로써 오히려 더욱 성숙한 공동체적 자아의 실현자가 되었으며 곧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타고르 명제의 전형적 실천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남관이 지역성의 표출만이 아니라 자신의 독창적인 미의식과 방법의 모색이 없이는 결코 유럽화단에서 우뚝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슈라즈나 마네시에, 폴리아코프, 피카소 등과 필적하여 뒤지지 않았던 그의 예술적 성과가 한국이라는 지역성의 표출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그가 깊이 유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예술적 성과를 더욱 빛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한다.


1958년 남관은 당대 저명한 대가들을 초대하는 살롱 드 메로 피카소와 브라크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살롱 드 메가 58년 이후로 5차례에 걸쳐 남관을 필요로 했듯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랑으로 알려져 있는 독일 함부르크의 멘슈 화랑, 이탈리아 밀라노의 코티나 화랑, 프랑스 파리의 베르카메르 화랑, 벨기에 브뤼셀의 랑그르 에귀 화랑들이 그의 작품을 앞다투어 전시하기도 하였다.


남관의 전시회는 많은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당시의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작품경향의 독특한 추상기법과 색채의 조화 등이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특질들로 남관의 예술세계를 높이 평가하며 국제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다. 1964년 미술평론가 조제 삐에르는 앵포르멜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남관을 평하였다.


남관의 회화에서 우선 눈을 끄는 것은 고도의 세련된 색채이다. 실제로 그는 어쩐지 피상적인 기교의 숙달에 빠져있는 파리체류의 일군의 극동 화가들 중에서 빼어날 뿐만 아니라 헤프고 구제할 길 없는 탕진 상태의 이른바 「앵포르멜」 작가들의 내적 빈곤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청록색의 반짝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명상(瞑想)을 유발하며 그것은 그린다는 행위 못지 않게 삶의 행위와도 관련된다.


1965년 파리의 플로랑스 우스통 브라운(Florence Houston Brown)화랑의 개인전에서 평론가 앙리 갈리깔리(Henry Galy Carles)는 남관의 예술을 고국의 영상과 사물들의 추억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상으로 형성하여 동양적인 특성을 지닌 예술이라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남관의 회화세계는 모두가 추억, 그의 소년 시절의 그리고 전쟁 전의 한국의 풍경, 옛 유적, 파괴되었거나 이미 아득한 사물들의 추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추억은 끈질기게 되살려지고 있으며, 민감하고 인간적인 유동성을 통해 동양의 호흡에 특유한 초시간적인 차원에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꿈과 상상적인 차원에 깊은 침잠으로부터 모든 사물, 풍경, 유적의 전체 또는 그 부문이 공간과 시간을 거역하면서 「현존」이 되는 기적이 태어나는 것이다.


1966년의 국제적인 명성의 작가임을 확인케 해준 망통 회화 비엔날레 대상 수상은 세계적인 작가들과의 경합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명예상에는 타피에스, 시 대상에는 폴리아코프가 선정되었음을 보더라도 대상 수상자의 국제적인 위치와 그 예술성을 가치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파리 국립현대미술관과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 소장 작품을 두고 있는, 1970년대까지의 단 한사람의 한국 화가이기도 하였다.


남관의 독특한 작품의 창조 과정은 본래적으로 내재했던 예민한 예술적 감성과 비극적 상황의 체험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상적 자유형상 방법의 서구미학이 결합되면서 창조된 것이다. 파리에서 유행하는 국제미술사조에 자기중심 없이 편승하지 않고 한국인 화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파리에서 재정립시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양적인 사유와 명상과 서정성을 명백하게 반영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반영은 남관의 수법적, 방법적 독자성으로 틀 잡혀지게 되었다. 그것은 파리의 국제적인 분위기에 고무되어 자극되면서도 자신의 정신과 의식을 고수하려고 한 결과였다. 그가 서구미술계에 심어 놓은 한국작가로서의 예술성은 그만큼 독자적이 것이었고, 국제적인 인정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1968년 쟝 자크 레베크의 현재를 넘어서 미래에 보존 될 예술이라고 한 다음의 평은 체험에서 온 남관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남관은 영구한 생명을 지닌 예술을 지향하기 때문에 소위 「현대의 고민」이라는 것에 별로 개의하지 않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참여하지만 반드시 그의 시대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 남관은 전쟁이라는 묘지에서 재생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은, 비록 왜곡되고 마치 돌처럼 굳어지기는 했지만 세월이 쌓임으로서 생명이 주어진 광물과도 같은 육체의 승화인 것이다.


또한, 1969년 파리 씨뤼스화랑「빠리의 아시아 작가전」에서 미셀 타피에는 남관을 동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가라고 인정한바 있으며, 1978년 파리의 루씨아화랑「현대작가전」에서는 폰타나, 남관 등 23인의 작가들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국제적인 작가들이라고 말했다.


1973년 봄을 알려면 겨울이 있어야 하듯이 서양에서 동양을 그리는 작가라고 한 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인 베르나르 도리발은 "봄을 그리려면 겨울철이 있어야 한다"는 쟝자크 루소의 말을 인용하면서 남관은 한국을 드높이기 위해 파리에 있는 작가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한국의 빛깔과 문자적인 형상으로 나타나 남관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투명하고 무지개빛의 그리고 완전히 융합된 그의 마티에르는 이 한국의 화가가 서양의 화법을 몸에 익히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동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정묘하고도 세련된 감성에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동과 서의 문화적 「결혼」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만남을 남관은 스스럼 없이 드높이고 있거니와 어딘가 모르게 애수에 젖은 듯 한 미소가 그것을 한층 더 감동 깊은 것으로 하고 있다.


1977년 tm위스 로잔느 문화관 개인전(1977. 11)에서 당시의 「남관전」에 대해 스위스의「트리뷘 드 주네브(Tribune de Geneve)지(紙)」11월 14일 자에 「남관의 비밀-옛적 문명에서 태어난 기호(記號)들」이라는 폴 클랭의 장문의 글이 실렸다.


스위스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11월 4일부터 16일에 걸쳐 로잔느의 롤라(문화관)에서 한 한국화가가 그의 최근작(72∼76년)으로 전람회를 가졌다. … 이 전시회에서 우리는 단숨에 추상과 구상을 연결하는 마무리의 솜씨와 특히 청색주조의 색채선택, 그리고 그 색채의 투명성, 유동성, 그리고 광휘성에 사로잡힌다. 이들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클레와 오토 네벨의 작품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상기하게 된다. 기호, 상형문자, 흔적 등이 그렇다.


1978년 4월의 룩셈부르크의 뀌떼화랑에서 「남관전」에 대해 조제프 항크는 남관의 색채를 인상주의적인 색조의 변조를 지니면서 그 색채의 반짝임이 어떤 형상적인 암시를 포착할 수 있게 하는 수수께끼의 메시지라 하면서 IM BRENNPUNKT지(紙)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남관의 작품에는 기실, 극동에 소중한 테마와 유럽적 회화표현의 성공적인 혼합, 아니 차라리 공생(共生)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우선 형태의 아름다움, 유럽인들에게는 얼마간 상형문자적인 정교한 형태와 기호의 조종이 있고 그리고 뛰어난 색채적 조화가 있다. … 그리고 그 세련성은 청색과 백색의 색조대비, 초록, 빨강, 보라빛 주조의 중간색에 의해 정묘하게 시사된 분위기에 의해 얻어진다. … 이 화가가 색채의 반짝임-그 색채의 아로새김과 아스라함에 있어 거의 인상주의적인 색조의 변조를 지닌 그 반짝임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한 형태들 속에서 우리는 때로 그 어떤 구상적인 암시를 포착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에서 보자면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은 풀길 없는 메시지인 것이다.


1979년 현대화랑 개인전 서문에 미술사학자 가스통 딜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예술로서 남관을 평하고 있다. 오랜 남관과의 교류가 있은 듯 남관에 대한 예술세계와 생활, 그리고 남관의 독자적인 예술세계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랜 파리생활, 그리고 거의 세계 각지에서 얻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으로 해서 고국을 잊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 그는 동료들의 획일적인 회화운동이니 유행적인 경향을 떠나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과 영감과 용솟음치는 열정을 살리기 위해서 그 모든 장해물을 극복해가면서 정진했다. 남관이 지켜온 일관성 있는 언어의 그 놀라울만한 독특성, 그것은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불가결의 것이자 다양한 기법상의 다양성에다 한국 전통의 형태적 풍요로움을 은밀하게 결합시킨 데 있다 할 것이며, … 그가 만들어내는 기호의 기념비적이고도 생명력에 가득찬 성격 때문이며 또한 그의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색채에 대한 강렬한 감정 때문이다. … 동시에 우리시대를 휩싸고 있는 「공간=시간」의 문제에 어떤 답을 모색하고 있는 이 불안스러운 시대의 고민을 초월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요소를 그의 회화는 지니고 있다.


이러한 남관의 회화가 앵포르멜을 뛰어넘는 독자적 경지에 있음을 서구인으로서 비교적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 미술에의 가장 직접적인 체험자의 한사람인 그가 진정한 자기인식과 자기발견에 이름으로써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던 것은 주체 소외로 말미암아 현기증을 내고 있는 우리 현대미술에도 또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서구 미술의 현장에서 한국적 동일성을 깊이 자각하고 서구의 미술사와 미학을 주체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우리의 근대미술을 비판적으로 반성한 그의 태도는, 특히 관념의 유희에만 탐닉했던 우리의 현대미술, 특히 7,80년대의 미술이 범한 제3세계적 시행착오를 반성해볼 때, 그의 미술에 청아하게 드러난 미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감회를 주는 것이다.


다음은 1990년 진화랑이 주최한 일본의 동경《남관전-제1회 TOKYO ART EXPO 90》의 서문에 가와기다미찌아끼는 현대적인면서도 고대적인 남관의 예술세계를 동서양의 미관을 연결하며 독자의 경지를 이룩한 현대작가라고 결론짓고 있다.


남관의 작품속에는 오늘의 우리들의 기분을 깊게 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만 아름답다던가 교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그 먼 지평에서 혹은 마음속 깊은 골짝의 피안에서 시간 공간의 미묘한 벽을 넘어 절실히 전해져 오는 것이 있다. … 그것은 현대적인 것과 동시에 고대적이고 현세적인 것과 동시에 영계적이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리듬과 멜로디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또한 거기엔 역사와 현실이 교차하는 화감, 현세와 영계가 뒤엉켜 신비의 미적 감각의 원점이 있다는 것에 매료될 것이다. 남관화백이 동서양의 미관을 연결하며 독자의 경지를 이룩한 현대작가라는 평가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남관의 전시회를 통한 평으로 알 수 있듯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탁월한 예술정신과 창작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의 미술사에는 그의 예술적 성과와 의의를 소홀히 다루어 왔다. 어쩌면 반평생이 국외 생활이었던 그는 국내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관은 현대미술사의 사조나 유행에 무관심한 것은 거시적인 미술사의 진실을 믿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관은 일찍이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 타피에스나 폴리아코프 등과 더불어 상을 받았으나 국제적인 평가는 그들에게 뒤지고 말았다. 그것은 남관을 포함해서 한국의 현대작가들이 외국에 살면서도 그 지역사회 또는 국제적인 평가를 제대로 못 받았다는 한국적인 비극이 남관을 파리에 살면서도 한국의 화가가 되게 한 것이다. 근 40년 동안 유럽을 오가며 정력적인 활동을 한 남관의 예술가적인 생애는 그의 작품을 사랑하며 해설하려는 평론가의 주관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그는 타피에스나 폴리아코프 못지 않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가 남관의 문제이기 이전에 한국현대미술의 숙제이기도 하다.


남관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으며, 이 일을 평생동안 지켜왔다. 성실과 인내심으로 작품제작에만 주력해 온 남관은 미술계에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한국현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유영국, 김환기와 함께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또한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국제적인 성과를 이룩한 작가로서 남관의 미술사적 위치를 말해 주고 있다 하겠다.


6. 결론


우리의 근대미술은 일제시대와 해방후라는 양대기(兩大期)로 일단 크게 구분되고 있다. 전자는 일본을 통한 서구의 미술을 공부함으로서 소위 현대미술의 첫걸음을 내딛어 오늘의 우리미술이 밑거름 되어 이른바 선구자들의 역할을 했으며, 후자는 서구미술(西歐美術)의 직접적인 접촉, 내지는 폭 넓은 식견을 다각적으로 습득하고 체계적인 교육, 우호적인 사회적 인식이라는 여건 속에서 성장하여 현대와 우리의 미술이라는 의식을 찾았다. 이와 같은 구분은 남관의 경우 전후에 모두 걸쳐 살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남관은 일본미술교육을 그들의 치하(治下)에서 받고, 해방 후에는 서구미술을 직접 습득하여 우리의 문화적인 빈곤기를 외국유학으로 보낸 것이다.


자연적이면서 표현적인 화풍에서 출발하여 선전과 국전에서 이미 권위를 인정받았던 작가 남관은 1911년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났으며, 1925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태평양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쿠마오카 미술연구소에서 5년간 연구를 하였으며, 제전, 문전, 동광회, 국화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 남관은 인상파로부터, 야수파, 입체파에 이르는 서구의 구상적 표현방법을 일본에서 익혀 인물화 위주의 서정적인 구상작품을 제작하였다. 2차대전은 우리나라의 해방을 가져다 주었고 남관은 귀국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게된다. 그러나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겪게 되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예술세계의 원천이 된다. 1955년 원하던 파리에서의 예술탐구는 초기 반추상에서 추상에로의 그의 작품세계가 급변하는 하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곳의 앵포르멜의 영향하에서 남관은 전후 전쟁의 체험을 근간으로 자신의 예술적 질료 속에 응축시키고 순화시키는 반추를 거듭한 끝에 자기 양식을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파리라는 국제 무대에서 독자적인 화풍으로 조형예술을 승화시키게 된 것이다.


모색기의 활동전개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탐구시기와 구상양식을 자신의 기질과 새로운 조형감각에 동화시켜 토착화된 지성적 감성으로 반추상적 탐구시기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로 심상적 추상의 파리시기는 작품활동과 그의 잠재적인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1958년 살롱 드 메에 초대되면서 알려지게 된다. 살롱 드 메는 프랑스적이고 전통적인 전시회로서 국제양식을 무비판적, 무절제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성급하게 드러내 보이려는 전후의 신선하고 젊으나 미숙한 세력을 당시의 파리는 극도로 경계했으며 남관과 같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가를 살롱 드 메는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동경유학시절 모방과 답습으로부터 전후 조국을 떠난 자신의 번뇌를 예술적인 경지로 승화시킨 예술가의 본성에서 발로된 것이며, 영구적인 생명을 지닌 예술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깊은 심중과 표현상의 상상성은 다른 주제들의 내면에서도 명료하게 상통되는 독창성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동양적인 사유(思惟)의 작업은 국제적 성가를 확립하게 하였고, 파리를 비롯한 서구(西歐)의 여러 도시의 유명한 화랑으로부터 잇따른 작품전 초대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망통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차지하게 된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구 각국의 도시에서 계속 이루어진 초대 작품전 기록에 상세히 밝혀져 있듯이 남관은 1968년 귀국 후에도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을 하였는데, 기호적 인간상의 추상표현의 세계로 자신의 내면세계와 우주적 질서에 그 바탕을 둔 작품들은 1968년 귀국전에 파리에서 틀 잡힌 남관의 특질적 형상 창조로 상징, 환상 등의 화면 작업을 다채롭고 자유롭게 부각시킨 내밀화로 추구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귀국 후의 남관 예술에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다만 기법적인 묘미와 색상 혹은 공간 분위기 등에서 신비감과 구체적인 추상 형태들, 곧 문자성, 기호성, 상징성, 그밖에 어떤 고대 유물의 표정 등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조형적 창조 세계였다.


이와 같은 남관의 작품세계는 비극적 체험의 실존적 내면세계의 천태만상의 인간상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으며, 기호화된 인간형상을 꼴라주의 다중적 재질감의 마티에르로 동양적인 신비의 색채인 청색을 주조로 한 세련된 색채조화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다양한 전통적 테마를 자신의 조형언어와 결부시켜 전쟁의 시체 얼굴, 안동의 하회탈, 고대의 유물 내지 전통적인 상형문자를 떠올리게 하였으며, 초기의 어두운 화면을 벗어나 점차 밝아지며 독특한 기법으로 오랜 시간의 경과와 흔적의 시각적 효과를 위해, 얼룩이나 발묵, 드리핑(dripping), 데깔코마니(decalcomanie), 꼴라쥬, 데꼴라쥬 또는 네거티브꼴라쥬 기법을 이용한다. 또한 동양의 전통 색채인 쪽빛(푸른색)의 풍부한 감성과 무한한 깊이는 남관 예술의 독특한 아름다움의 요체의 색채로서 신비와 영원, 불멸을 상징화하였다.


이와같이 남관의 예술세계는 전후 파리 화단의 앵포르멜 영향하에서, 서양의 기법을 동양 전통의 정신 세계로 독특한 조형의 세계를 융합해 내었다. 그것은 어느 운동, 주의에 편승하지 않는 개척정신의 산물이며 이러한 남관의 예술세계는 오늘날 현대예술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또한 국제적인 성과와 함께 유럽의 유명한 미술관의 개인전, 초대전, 그리고 파리 국립현대미술관등에 작품이 소장된 최초의 한국작가이며. 베르나르 도리발, 쟝 자크 레베크등의 현대미술평가의 권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한국을 빛낸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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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보




도판목록


참고도판목록


원문보기:http://www.eduart2000.com/nonmun/nonmun/이두연논문(그림제외).hwp


출처: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편집(정리):가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