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남관 - 80년의 생애와 예술' 화집에 실린 글이다.



남관 회화의 형성 - 서울과 파리

 

                                                                                                       유 준 상 (미술평론가)

 

  남관의 예술이 파리의 미술여론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60년대 중반의 일이다. 이때 남관은 50대초의 원숙기였으며, 파리에 정착한 지10년이 흐르고 있었다. 남관이 그의 오랜 숙원이던 파리진출을 실현했던 것은 54년 겨울이며, 프랑스 근대 미술의 요람지이자 에콜 드 파리의 노스탈지어가 젖어 있는 몽파르나쓰의 한 구석에 아트리에를 정한 것은 55년의 일이다. 에콜 드 파리의 전설적인 인물들인 모딜리아니(A. Modi91i-ani), 스보로프스키(Zbrowski), 리베라(Diego Rivera), 쟈코브(MaxJacob), 헤스팅그스(fastings), 수틴(Ch. Soutine) 등이 단골로 드나들던 카페 도톤느(Eaff d'Autoinne)에서 가까운 괴테 거리의 막다른 골목 안에 그의 아트리에가 있었다. 골목의 담 너머에 몽파르나쓰 묘지가 있어, 보들레르(Ch. Baudelaire)가 잠들어 있는 유서 깊은 정적이 배어 흐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트리에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낡은 삼급 주택건물의 지하실이었다. 바닥에는 늘 물이 고여 있었고, 두서너 개의 벌거숭이 전등은 밤낮없이 번쩍이고 있어서, 이러한 인공적인 빛이 벽면의 습기를 축축하게 반사하였다. 바닥에 벽돌을 고이고 그 위에 캔버스를 세운 다음 벽에 기대어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게, 남관의 작업 광경이었다.그는 모딜리아니들처림 카페 도톤느의 단골은 아니었으며, 2차세계대전 전야의 유럽의 운명에 대해 열띤 연설을 주고 받던 20세기초의 로맨틱한 화가들과는 본성적으로 거리가 있는, 동양의 은자(隱者)로 비유됨직한 화가였다.


 그는 카페 도톤드 건너편에 있는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엘(Academie do la Grande Ehaumifr)에 간혹 모습을 보이곤 했다. 55년에 제작한 「습작」은 여기서의 에튜드이다. 그랑드 쇼미엘은 아카데미 쥬리앙과 더불어, 평판있는 화숙으로서, 20세기초 파리로 모여든 예술적 코스모포리턴들이 여기를 본거지로해서 엑조틱한 예술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랑드 쇼미엘이 에트랑제들의 집합소였던데 비해, 쥬리앙은프랑스적인 고전파가 모여 있었다.


  40대초 파리에 정착한 남관은 어떤 면에서도 학생 신분으로서의 미술학도는 아니었다. 정규과정으로서의 고전적 학습을 이미 일본에서 습득한 그는, 직업적인 화가였으며, 자기 고유의 미술관을 불혹(不惑)의 연륜에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경의 태평양 미술학교를 35년에 졸업하고, 이차대전 말기를 구마오카 미술연구소의 조교로 지내며, 동광회, 국화회 등의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수 차 발표했고, 보다 규모가 큰 공인 전시회인 문전에도 출품하였다. 이 무렵의 그는, 풍경화보다 인물화를 주로 다루었는데, 초상화라기보다 인물을 주제로 한 생활정경이 그의 화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의 작품(40년대)은 대부분 분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못하나, 51년 일본에서 제작한 「고향의 노인들」을 통해 그 무렵의 그의 화풍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1940년대의 그의 화풍은 문학적 서술의 내용과 선묘적(線描的)인 조형적 양식이 공존하는 회화 세계라고 하겠으며, 그의 견고한 기초적 소묘력이 전체의 화면을 건실하게 구성해 주고 있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당시의 화풍은 남관의 예술 발상이 순수하게 조형적 관심만으로 유발되었던 게 아니라 문학적 충동이 굵은 뿌리로서 그의 기조음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것을 근대화가의 유형 분류를 통해 설명하면, 마티스나 루오, 또는 르노와르의 유형에서보다 드가의 예술적 특성에서 그 연고성이 추적될 것으로 보인다. 생전의 남관에게는 금욕주의적인 일면이 있었으며, 이러한 개인적 성향이 예술적 관념과 혼합되어 고독한 예술가의 영상으로, 때론 은둔자의 비현세적, 또는 유아독존적인 고독의 모습으로 비치게 하였다. 50년대의 몽파르나쓰는, 모딜리아니 등이 조성했던 보헤미안의 숨결이 이차대전의 포성으로 일거에 무산되어, 여기서 교류되었던 미술정보의 밀도가 공백의 상태로 단절된 정황을 맞이 하였다. 카페 도톤느는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젊고 경망한 병사들의 단골집이 되었으며, 아부상이나 포도주 대신 코카콜라와 아이스커피(유럽인은 아이스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가 팔렸다.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엘도 풋내기 미술가 지망생과 딜레탕트한 미술 여행자들이 일과성의 호기심으로 드나드는, 과거의 명소로퇴색하고 있었다.


  남관 도불 당시의 파리에는 대략 이십명 정도의 한국인이 있었으며, 예술가로는 이성자(51년), 김흥수(55년), 김중업(54년), 손동진(56년) 등이 나름대로의 예술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의 외교 대표부로 외교연락사무소격인 레가숑 드 코레가 라 스파유 거리의 건물 이층 한쪽을 빌려, 태극기를 달아놓고 있었을 뿐이다. 한국 동란 당시,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38만달러였던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눈물겨운 상징물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원석이라는 사람이 공사대리로 있었으며 모든 외교업무를 혼자서 처리하고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남관은, 자신의 예술을 사회적 교섭의 형식으로 공개하는 어떤 방법도 모르고 있었으며, 독학으로 익힌 프랑스어 지식은 당장엔 별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을 미술 여론의 대상으로 환기시켜줄 만한 문화 외교의 전문직종이 별도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껴야만 했으며,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근대미술의 중심지 파리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시공간(時空間) 속의 허공이 있다는 것을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또는 세계미술의 소용돌이의 중심부가 이미 파리를 떠나, 그곳은 공동화 현상을 보이는 맹반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결과론적인 말이 되겠지만, 당시 한국의 미술가들은 예외없이 파리를 동경하여, 거의 편애에 가까운 맹목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도리앙 그레이의 초상화 같은 환각일 수도 있었으며, 지난 날의 파리가 베풀던, 그 환상적인 영상과는 달리 그 실체는 낡고 병든 육신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분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파리는 지난날의 추억을 먹고사는 쇠퇴기의 징후를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남관은 그의 청춘을 보낸 일본의 미술가들과 불가피하게,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된다. 19세기말부터 많은 화가들을 진출시킨 일본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선배였고, 같은 동양인이라는 정서적 친밀감과 기대감이, 추상적인 민족적 인과를 우선하는 현실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들을 통해, 파리의 쁘띠 파레(Petit Palals)에서 관례적으로 「외국인 화가전」이 개최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여기에 출품하게 된다. 이것이 남관의 작품이 파리에서 일반 관중에게 공개되는 첫번째 계기가 된다. 그리고 남관을 「친일파」 혹은 「반민족」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매도하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파리는 「르 사롱(Le Salon)), 「사롱 도톤느(Salon d'Automne)),「사롱 앙데팡당(Salon des Artistes indfpendants)」, 「사롱 드 메(Salon doMai)」, 「레아리테 누벨(Salon des Rfalitfs Nouvelles)」, 「사롱 쉬르 앙데팡당(Salon Sur-Indfpendants)」 등 일곱개의 공식적인 연례행사가 있었으며,이 가운데 「사롱 드 메」와 「레아리테 누벨」은 시대양식을 대표하는 전시회였다. 「사롱」은 루이 14세가 창설한 전람회로, 지난 날엔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톤느」에 의해, 19세기말 그 상징성이 실추된 바 있으며 「앙데팡당」은 에콜 드 파리의 본산을 이루었었지만 역시 퇴색의기미를 어쩔 수 없이 보이고 있었다. 화랑의 파트롱들이 무명작가들을 예술, 경제적으로 옹호하는 새로운 미술 풍토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쉬르 앙데팡당」은 소수 권익의 섹트조직으로 겨우 명색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세월과 더불어 남관의 시야는, 이러한 미술판도의 원근법에 차츰 익숙해지며 정신위생학적으로도 파리 화단의 생리에 대한 자신의 적응력을 높여 나갔다. 56년에는 「사롱 드 메」에 초대된다. 파리에 정착한 지 햇수로 사년만의 일이었다. (51년에 도불한 이성자는, 「앙데팡당」(56)과 「쉬르 앙데팡당」(57, 58, 59, 60)에 출품하고 있으며 61년 「레아리테누벨」과 64년 「사롱 드 메」에 초대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사롱 드 메」에 관한 주석이 필요할 것 같다. 5월에 개최되는 이 초대전은, 처음 대독 레지스탕스로 결성된 문화저항, 또는 문화보호의 이념으로 조직되었으며 45년 첫 회가 열렸다. 이것의 표지(Identity)는, 이른바 전위미술이라는 것이지만, 게르만적인 요소로서의 표현주의, 또는 슬라브적인 추상주의하고는 구별되는, 실험미술로서의 아방가르드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프랑스의 영광을 후광으로 하는 시대양식으로서, 당시 생존해 있던 피카소(Pablo  Picasso), 마티스(Hen.iMatisse), 루오(Georges Ten.i Rouault) 등도 초대되었으며, 마네시에(Alfred Manessier), 생지에(Gustave Singler), 아르뚱(Hans Hartung), 곤잘레츠(Julio Gonfaler) 등이 초대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절충적이고 점진적인 전위미술이라고 하겠으며, 50년대초 파리화단이 「뜨거운 추상」으로 열병을 치루어야 했던 앵포르멜의 급진성하고는 별도의, 관제 전위운동이라고 하겠다. 프랑스적인 합리주의, 현실주의, 논리성의 전통이 점진성을 가지고 미술운동으로 반영된, 어쩔 수 없는 시대조류에의 동참을 문화 정책적으로 조직한 것이, 이 전시회의 기본구조라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다시 말하면 품위있고 권위적인, 따라서 프랑스적인 아방가르드운동인 셈이다. 이러한 평가의 근거는 당시의 세계미술이 프랑스적인 중용으로부터, 급진적이고 산업사회적인 현실인지로 변환되는현상을 감안하는 데서 제기된, 상대적인 관점임은 부언할 것이 없다.남관을 「사롱 드 메」에 초대한 주최 측의 책임자이자 평론가인 가스통딜(Gaston Oiehl)은 58년 당시의 남관을 다음처럼 회고한 바 있다. 『남관이야말로 서양문화를 흡수하고, 또한 동양문화의 어느 일부조차 희생시킴이 없이, 동서를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융합시키는 거의 독보적인 예술가이다. 』 그리고 그에 대한 인상을 『꾸준한 인내와 여유있는 제어력을 가지고 새로운 상형을 창출해내는 작가』로 적은 바 있으며, 그의 화면에 대해서는, 『생동하는 기호들로 구성된 필체로써, 신비스러운 형체와 상질적인 세공으로, 고동치는 유기체의 모습을 정연하게 띠고 있는 유연한 단편조각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긴 띠처럼 펼쳐져 나가는 세월로 해석하고 있다.


  50년대말의 남관은 몽파르나쓰의 그 어둡고 습기찬 아트리에에서 벗어나, 파리 남쪽의 라푸라스로 옮긴다. 어떤 조각가가 쓰던 아트리에인데,그가 떠나고 남관이 새주인이 된 것이다. 맑은 공기와 밝은 햇살이 비치는 아트리에였다. 새로운 관경 속에서 남관은 심기일변하는 태도로 임한다. 후담이지만 이 아트리에는, 그 무렵 파리에 도착한 이세득이구한 것이었는데, 혼자 쓰기에는 공간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워 남관과 상의하여 공동제작실로 정한 것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커텐으로 꾸민 칸막이가 있었는데, 이세득은 당시의 정경을 다음처럼 증언하고 있다.


  영감이 떠오를 때면 남관은, 한밤중에도 일어나서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럴 때의 그는, 캔버스를 지면에 깔고 그 위에 서체의 획을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자른 지편들을 이리저리 구성하여 전체의 구도를 잡아보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여러번 되풀이하는 동안 마음에 맞는 구도가 결정되면, 그 위에 안료를 뿌리거나 칠하는 작업이 다음으로 계속된다고 한다. 「꼴라쥬」('67), 「역사의 흔적」('63), 「고성의 인상」('62) 「비와 환상」('67), 「허물어진 고적」('66),「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65), 「독백」('67) 등이 이러한 작업의 결과인데, 여기서는 「꼴라쥬」('67)를 예시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꼴라쥬는 20세기초 입체파가 시도했던 꼴레 기법을 발전시킨, 표현상의 물질, 또는 오브제 의식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입체파가 추상적인 선맥만으로 화면을 해체한 후, 여기에 일상적인 현실감을 회복시킨다는 의도로 신문지, 라벨, 차표 심지어는 모래나 철사 등을 접착제를 사용해서 첨가시킨 것이 꼴라쥬의 원형이라고 하겠다. 회화표현에서 포름을 배제하면, 남는 것은 캔버스 표면의 안료 뿐이며, 이러한 물질적인 상모에서 현대회화는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이었다. 이른바 마티에르 의식이라는 것이다.


  50년대 초의 파리 화단은 「뜨거운 추상」이라는 미술 논쟁의 격변기를겪으며, 타피에(Nickel Tapif)의 「또 하나의 미술」이, 포트리에(JeanFautrier), 뒤뷔페(Jean Dubuffet) 등이 대표하는 「마티에르가 그 이미지를 자유롭게 형성하는 바로 그 순간」을 표현하려는 현대적 경향의 회화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예술은 도구와 소재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며, 도구의 흔적, 도구와 소재의 격투의 자국을 기록해야만 한다. 인간은 말해야하지만, 도구와 소재도 또한 말해야 한다」는 뒤뷔페의 입장은, 50년대의 젊은 화가들에게 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두 차례의 전화로 유럽의 기존질서가 와해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질서를 지탱해 온 관념체계의 퇴색 후에 나타나게 된 원초회귀로서의 물질관을 들 수 있다. 보링거(WilhelmWorringer)식으로 말하면, 합리주의적 인식의 도정을 지나온 끝에 또 다시 인간정신 속에 싹트게 된, 물질에의 감정이 지(知)를 대신하는 궁극적인 체관이 각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구미작가들은 뿌리고 흘리며 문지르고 긁고 할퀴며 뚫기까지 했었다. 물질은, 신체적인 액션을 통해 인간화에로의 접촉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었으며, 이러한 물질화의 상황을 레스타니 (Pierre Restany, 프랑스 평론가)는 「제스트(geste)의 시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남관의 「꼴라쥬」는 이들과는 다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서체의 획을 연상시키는 그의 꼴라쥬는, 물(톤) 자체라기보다, 어떤 영상을 구성하기 위한 제어 단위로서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가령 동양의상형은 여러 획들로 구성되는데, 그의 꼴라쥬는 이러한 전체의 패턴을 구성하는 단위라는 역할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관의 아프리오리라기보다, 서도 문화권에서 생성한 문화적 인과와 상맥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점이 유립의 추상화가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표지인 것이었다. 꼴라쥬는 「태고」('67), 「하나의 형태」('67) 「공포」('67), 「정」('68) 등에서도 보는 바처럼 유사한 구성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게슈탈트의 관점에서 말하면, 한자 문화권의 패턴 인식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수직과 수평의 획들로 구성되는 전체의인상은 네모꼴 모양을 인지하게 한다. 이것은 한자의 구성원리가 네모꼴로 되어 있다는 다이아그람과 여러가지 의미에서 인척관계에 있음을 암시한다. 또는 우주의 구성원리를 원으로서가 아니라, 사각이라는 높은 단계의 추상화를 관념했던 동양적인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고 하겠다. 기하학적인 위상(Topology)으로서의 공간 인지가 수학적으로 정립되기 훨씬 이전에, 동양인은 사방형의 개념을 가지고 우주의 모형을 얻었던 것이며, 네모꼴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주를 상징체계로 이해했던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 자신도 동양인임을 전제하고서 하는 말임은 물론이다(그러나 현대과학은 인간의 공간 인지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연구보고를 한다. 인간은 사방형이라는 패턴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며,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이다).


  남관의 「꼴라쥬」는 당시의 파리 화단에선 독특한 추상화였으며, 동양의 표지를 응용했던 술라주(Pierre Soulages), 아르퉁(Hans Hartung)의 화면과는 그 발상의 추이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파리 화단의미술여론이 이러한 남관의 표지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은 여론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파리였기 때문이다. 통속적으로 보면, 파리는 여전히 텃세가 심했다는 것이며, 파리라는 중심지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던, 한국의 한 작가에 대해서 어떤 예비지식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관은 에꼴 드 파리의 철늦은 방문객으로 비유되며, 파장한 중간에 뒤늦게 찾아든 코스모폴리턴인었다. 이것은 남관의 개별사가 문화사회적 결정요인과 무관한 궤도에서 자생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기 보다, 한국미술사가 세계미술의 추이하고는 상관없이 편국적으로 운영되어 왔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한 예술가의 독자성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의 퍼스낼리티로서 자생한다고 믿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며 착각이다. 사회와 역사를 떠난 개인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모형이듯이, 한 개인의 역사는,그를 둘러싼 보다 큰 테두리로서의 사회와의 발전적 운동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정위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되는 게 없는 바와 같다.앞서 말한 대로 일본으로 건너 간 그는,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유화기법을 익히고, 40년대의 전쟁기간을 구마오카 미술연구소에서 실습조교로 보낸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 일본에서 신미술을 익힌 한국유학생은 45년의 종전시까지 대략 350명 정도인데, 이들은 한국근대미술사의 견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신미술은 프랑스 미술의 일방적 편애로 유발되었다는 것이 식자들의 견해이다. 이것은 일본인지라는 민족적 특성과 관계되는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가령 인상파 미술에 대한 지나친 짝사랑을 그 예로든다. 개화 초기의 일본 미술은 이른바 「외광파」라는 유파가 주류를 형성하였는데, 이 경향은 인상파의 일본적 번안과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반화된 미술 풍토가 20세기초의 일녈 미술계의 특성이었으며, 여기서 공부한 한국 유학생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남관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목표는 파리화단으로의 진출이었다.1940년대까지 파리에서 미술수학을 할 수 있었던 화가는, 이종우 한사람 뿐이었다. 1926년부터 약 삼년간 파리에 체류했던 그는, 살롱도톤느에서 두 점의 소품이 입선되는 실적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화가의 작품이 국제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이종우는 에콜 드 파리로 지목될 수는 없다. 그를 한국근대미술의 선각으로 지목했던 얼마 전까지의 관례는, 역사적 판단에서 연유한다기보다 당시의 한국 미술계가 국제 사정에 어두웠다는 점과, 환상적인 자가당착으로부터 비롯된 사대심리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종우는 미술사의 추이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했던 예술가는 아니며, 생리적인 호기심을 개인적인 기호로 번안했던 미술가였다. 실제에 있어서도, 거의 40년간 그는 작품을 생산한 바 없다. 이러한 이종우에 비하면 남관은 처음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파리로 진출한 화가였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도착 당시의 파리는 세계미술로의 구심력을 잃어버리고 있던 때였으며, 세계 화단에는 북방적 요인으로서의 표현주의와 미국 등지의 액션 페인팅, 팝아트 등이 새로운 미술 표지로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년시절부터 동경해 온 파리 진출의 꿈은, 남관의 예술관을 라틴적인 특성으로 잠재시켰던 것으로 보여지며, 급진적이고 과격한 실험정신에서보다, 점진적이며 중용적이고 합리적인 예술관이 남관의 의식 속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파리가 환영하는 예술가의 모형이기도 했다.『만일 내가 봄을 그리고 싶다면, 나는 겨울에 있어야 한다』는 쟝 자끄루소(Jean Jacques Rousseau)의 말을 인용하면서, 도리발(Bemard Donval)은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제작하고 있는 남관 개인전의 서문을 시작한다. (도리발은 현대 미술의 탁월한 해설자이며, 파리 근대 미술관 관장을 역임한바 있다. ) 그는 이어서, 『투명하고 무지개 빛의, 그리고 완전히 응합된 그의 마티에르는 이 한국의 화가가 서양의 화법을 몸에 익히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정묘하고도 세련된 감성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으며, 이것이 그의 작품을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만남으로 융합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외 많은 파리의 미술평론가들이 남관의 예술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며, 쟝 쟈크 레베크(Jean Jacques Leveque), 가스통 디일(GastonDiehl), 앙리 갈리 칼르(Henry Galy-Carles), 폴 클랭(Paul Klaim) 등이 글을 썼다. 이들은 비의전수로서의 신비로운 칼리그라피(Calligraphy)의 세계와 푸른 바탕이 기조음으로 융합되는 시적인 화면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남관의 예술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66년 망똥 국제회화제에 출품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이 1등상을 수상하면서 확인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미술가들이 동경해 왔던 파리 화단에서의 입지전을 남관이 비로소 성취한 셈이었다.


  인간이 사방형의 패턴을 인식하는 과정은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것과 같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것의 예로 동양인이 우주의 개념을 이른바 음양오행의 사방형으로 도상했던 모형을 들 수 있다.서양인들의 공간에 관한 인식인 토폴로지(위상)는, 유크리트적 공간의 기초가 되는 측정적(Metrical)인 관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데 있었으며, 피타고라스가 기원전에 정리한 기하학의 법칙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이 대상을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은 세계를 하나의 조형적 공간으로 이해하게 했으며, 모든 조형 예술이 필연적으로 공간의 예술이 되는 기원이 여기서 발견된다. 따라서 포름(형식=인식패턴의 기조단위)은 정신활동의 해석 일반에 응용되는, 공간과 시간의 인간 형식이라고 하겠으며, 추상충동의 고도의 단계에서수학을 발견했던 발생적 인식의 근원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그래서 포름(form)은 조형적인 것뿐 아니라, 음악, 문학, 수학의 것이기도 하다고 프랑카스텔(p. Francastel)은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과를시원적으로 소급하면, 인간은 처음 사물 자체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이름」을 발견한 것이며, 이러한 이름들로 구조화된 패러다임을 「세계」로서 이해한다고 하겠다.


  20세기 초의 큐비즘이 그 공간분석을 유크리트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토포로지적인 표상으로 제기했던 것은 이러한 공간직관으로서의 프리미티비즘(pnmltivism, 원초주의)으로부터 미술의 형식을 새롭게 구성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차대전 이후 앞에서도 말한 바처럼, 마티에르와 액션의 상보관계를 보인 휘갈기기, 즉흥성으로서의 칠하기, 뿌리기, 번지기, 뭉개기 등의, 신체 운동을 통한 투영적 공간의 모색기가 대두되며, 옵아트 또는 미니멀아트 등의 측정적인 토포로지의 미술이 이어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직관은, 개별의 생물학적 성장 혹은 개체적 발달로서 성취되는겄은 아니며, 그 개별이 문명사와 연계될 때 구상성을 띠게 된다. 마치 어린애가 현실 그 자체를 이해 못하고 환상적인 모형으로서의베일을 통해 세계를 내다 보다가, 그의 행동과 지각이 역사적인 원천과 연계되면서 하나의 인격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관의 사방형적인 구축세계는, 서도의 획을 연상시키는 단위들이 꼴라쥬의 기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이것의 전체상이 상형의 구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나타난다는 것은 앞에서도말했다. 우리는 이 해독할 수 없는 상형에서 또다른 표상을 연상케되는데, 천하대장군의 머리부분 또는 한국고유의 「탈」의 표정이 이중사 된다는 것이다. 생전의 그는 이 세계를 「마스크」라고 명명하였다. 가면이란, 본상이 아니라 그것을 덮어 감추는 문자 그대로의 탈을 가리킨다. 이것은 문명이 하나의 허구임을 은유할 수도있으며, 마스크와 동의어인 「페르소나(persona)」가 인격의 어원임을 감안할 때, 남관은 인간의 허구성을 이러한 작품을 통해 고발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생전에 스토이스트의 인상을 주었지만, 어쩌면 인간혐오의 증세를 가시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생전의 그는 이인칭의 대화자는 아니었으며 늘 제삼자의 위치를 고수했던, 은둔하고 있는 관찰자로 보였다.


  70년대 초의 남관은 이러한 꼴라쥬를 벗기기 시작했다. 가면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까지 화면을 기리고 있던 「탈」이 벗겨지면, 안료가 묻지 않은 소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밤이, 여명의 먼 빛을 받아 밝아지면서, 어둠의 심연으로부터 뜻밖의 하얀 살갗을 드러내는 현상처럼, 남관의 파리 생활에 있어서의 여명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또는 강한 빛의 자극으로 눈을 굳게 감았을 때, 망막에 떠오르는 잔상으로 비유해 볼 수도 있다. 이제까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소지는 푸른 빛으로 대치되며, 신라시대 유물의 장식적인 귀족적 문양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패턴들이, 하얀 윤곽들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의 토포로지가 문명사와 연계되는 장면인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인체기구를 모델로 하는 수직구도를 실험하며, 직립 존재로서의 인간의 인식세계를, 그 존재형식으로부터 새롭게 조명해 보려 하였다. 만년의 그는 장 쟈크 레베크에게 자신의 예술관을이처럼 요약한 적이 있다. 『나는 완전한 형태나 피부를 가진 것보다 그 내포된 생명-즉 본질과 가치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통속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가혹한 고비를 견디어 온 사람들에게서 그와 같은 가혹한 경지를 겪으면서도 신이라든가 어떤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을 이어가려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간은 원래부터 수직생명으로 이 지상에 군림한 것은 아니다. 다른 동물처럼 네발로 땅을 기고 살던 생명들이었다. 이것이 진화되면서 수직으로 일어서게 되었고 따라서 공간을 원근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보다 월등히 큰 것으로 진화되었다는 점과, 따라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상징을 사역할 수 있는 생명으로 발전되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인간들에 의해서 지구의 생태계가 인간화의 과정을 밟게 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가 그것의 현존형인 것이다. 남관은 이러한 인간의 언어기능을, 그것을 유발시킨 인간 자신의 생체기능으로부터 재조명하였다. 이에 관한 구상을 70대 후반부터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 이러한 신체기능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었으며, 이러한 신체가 소멸되면서 그의 영혼은 분리되어 이승을 떠난 것이었다. 끝으로 부기하고 싶은 것은, 남관 예술에 관한 가치 평가에 앞서서, 그가 성실하고 깊은 인내심을 갖춘 정신노동자였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인생이었으며, 이 일을 평생동안 지켜왔다. 예술에 관한사변이나 또는 이것을 수단으로 하는 속물주의의 어떤 징후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일하는 미술가의 실체를 역사적 본보기로 남겨놓은 실천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