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속의 그 무엇...

동양 사람들이 어떤 인물의 성격을 명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마스크 속에는 시간을 초월한, 혹은 시간을 고정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만일에 우리가 아직도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다면(이런 표현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나 인간의 표현방법, 또는 시간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야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애매하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만) 어떤 「포름」은 영원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회화도 역시 너무 시대성을 띌 때에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하고 쉬이 위축해 버린다. 피상적인 시위행동은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시대성이라는 배경을 잃었을 때에는 의미를 상실할 뿐만 아리라 그 회화를 더욱 쇠퇴하게 한다. 오늘날 큰 시위를 하고 있는 소위 당대미술도 지나치게 우리의 이 「아름답고 생기있는 오늘」을 표현하는 데에만 치우쳤기 때문에 붕괴의 길에 처하여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은 말하자면 우리의 「현재」의 잔치에 불과한 것인데, 이 잔치라는 것은 그 의의가 바로 일시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오랜 생명을 가진 예술 - 그 가치가 현재를 넘어서 미래에 보존될 예술 -은 잔치식의 예술과는 반대로 그의 다채로운 광채를 한꺼번에 쏟아서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로 그 참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이런 예술은 인간성의 근원에 파고 드는 것이지, 인간을 자극 하는 것이 아니다. 싸르르 르브랑과 샤르댕의 대립, 루벤스의 「메디치 연작」과 램브란트의 대립, 그리고 송시대의 미술과 동양의 판화의 대립은 그 좋은 예이다.


남관은 이러한 영구한 생명을 지닌 예술을 지향하기 때문에 소위 「현대의 고민」이라는 것에 별로 개의하지 않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참여하지만 반드시 그의 시대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전쟁때(그는 한국사람인데, 저 잔혹한 한국전쟁때 전세계가 비겁하게도 동족끼리 서로 살육하게 내버려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부수적인 것을 찾지 않고 그 넘어 본질적인 것을 찾았다.


쟉크 깔로같은 현대보고기사(물론 대단히 재주있게 썻지만)를 쓰는 사람과는 달리 그는 죽음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시체와 부상을 입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코, 입, 눈들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고 비뚤어져 있는 것 같았고 전면에 받은 부상의 자욱, 그것이 꼭 고성의 돌담 조각들 같기도 했고, 석기시대의 깨어진 유물 조각들이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신음하다가 태양광선에 노출되면서 그 어덕더덕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남관은 전쟁이라는 묘지에서 재생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명시하는 것은, 비록 왜곡되고 마치 돌처럼 굳어지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이 쌓임으로서 생명이 주어진 광물과도 같은 육체의 승화인 것이다.


사고의 논리적 과정에 의해 그는 그가 통찰한 것을 보편화하여 태양이나 달, 개천가의 조약돌, 사과, 그밖의 오랜 생명을 지닌 것들을 남김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는 완전한 형태나 피부를 가진 것 보다 그 내포된 생명 - 즉 본질과 의의가 문제가 되었다. 다시말해서 극히 통속적으로 아름다운 것보다는 잔혹한 고비를 넘어온 인간상 - 그와 같은 잔혹한 경지를 겪으면서도 자기외의 어떤 커다란 힘, 즉 신에 의거하지 않고 자기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악착같이 생을 이어나가려는 이런 인간상 -이 한층 더 나를 유혹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은 모든 피상적인 감정을 떨쳐버리고 깊은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통찰한 나머지의 비참한 대화라고 하겠다.


흔히 감정의 으로 말미암아 예술이 죽어버리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오직 우리의 감수성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요, 아무런 영구적인 것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갈등 - 남관의 예술은 강철로 연마된 그의 영혼의 소산이다. 그처럼 심한 분노와 동의 절규, 공포와 죽음을 목격한 후, 영원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 무엇이 남았을 것인가 - 오직 저 생의 문턱인 무덤과 사원이 있었을 뿐이다.


남관의 마스크의 아름다움은 저 신비로운 Paques섬에 있는 조각들의 아름다움이요, 또한 심연에 잠겨있는 성스러운 우상의 아름다움이다.


시간을 초월한, 인위적인 인간의 단위를 부정하는, 비통한 음악이 이 시대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참으로 히귀하게 이루어진 이 회화의 행렬을 수반한다.

 

                                                                                                     미술평론가 쟝 쟊끄 레베끄

                                                                                                                        〈김진옥 譯〉

                                                                                                                               196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