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의 秘密


스위스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11월 4일부터 16일(77년)에 걸쳐 로잔느의 로올라에서 한 한국 화가가 그의 최근작(72~76년)으로 전람회를 가졌다. 하기는 백을 헤아리는 작품전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고 보면 그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경우, 그 우연이 남관이라는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화가를 만나게 했다. 東洋이라는 異域에서 온 모든 것이 약간은 그러하겠지만 그의 경우에는 한층 더 수수께끼와 매력에 차 있었다.


1911년 한국에서 태어난 남관은 고국에서 교수로 있었고, 2차대전 전 일본에서 수학했다. 그는 「모든 창작에 불가결한 침묵과 고독 속에서」 꾸준한 작업을 계속하였다.


수많은 전시회와 수상이 그의 재능을 확인해 주었고 그리고 다시 커다란 새로운 전환이 그의 생애에 이루어졌다.


“나는 1955년 파리에 와서 정착하였다. 그것은 서양미술을 직접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고국을 결코 등지지 않았으며 정규적으로 고국을 되찾곤 했다. 나는 파리의 미술관들을 돌아보고 런던, 독일, 스페인 등지를 여행했다. 나는 세잔느의 후기작품에 감명을 받았고 인상주의, 야수주의, 그리고 입체주의에 큰 자극을 받았다. 특히 클레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클레의 발견은 하나의 충격적인 啓示였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것을 단순히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인스피레이션의 원천으로 삼고 또 하나의 윤리적, 知的, 정신적 변혁의 계기로 삼는다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로잔느의 전시회에는 과슈, 수채, 꼴라쥬, 유채 등 4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는 단숨에 추상과 구상을 연결하는 마무리 솜씨와 특히 靑色主調의 색채 선택, 그리고 그 색채의 투명성, 유동성 그리고 光輝性에 사로 잡힌다.


이들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클레와 오토네벨의 작품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호․상형문자․흔적 등이 그렇다. 「읽기」에 쉽기도 하고 어려운 그의 작품은 솜씨 있게 가꾸어지고 빈틈없이 짜여져 있다.


남관은 다시다음과 같이 말을 계속한다.


“나는 나를 추상화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기천년을 내려온 나의 고국의 오랜 테마를 쓰고 있으며 그 테마들, 즉 돌, 고대유물, 데스마스크, 나아가서는 옛 식물문양 등 옛 문명의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적인 묘법으로 옮기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그러한 「묘법」이 생소해 신비스럽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제작 과정에 있어 혹시 그 어떤 신비스러운, 나아가서는 형이상학적인 메시지를 작품 속에 담으려는 뜻이 숨겨져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남관은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대답한다.


“모든 창조 작업은 강렬한 내적 생명을 내포하고 있고 물론 그 속에는 그 어떤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삼의 실존적 체험을 표현하려는 祈願과 그 어떤 전환이 따른다. 하기는 나 자신도 그 삶의 실존적 체험을 완벽하게 말로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이 화가의 말인즉 언어로서는 전달 불가능(화가들 사이에는 흔히 있는 현상이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남관은 다음과 같이 그의 말을 끝맺는다.


“모든 진정한 예술작품에 있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커다란 부분이 있음은 명확하다. 작품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은 항상 주관적인 「대중․관객․미술애호가」들이다. 대중의 그러한 습관적 차지 속에서 대중은 작품에다 그의 꿈, 그의 夢幻, 또 나아가서는 그의 개성을 부어 넣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혹자는 좋아하고 혹자는 싫어한다. 바로 여기에, 오직 좋아하는 사람에게만은 전달이 가능하나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전달 불가능 상태로 끝나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미술평론가 폴 클랭

                                                                                                                                                                                                  〈李 逸 譯〉

                                                                                                                                               (스위스 쥬네브 「트리핀 드 주네브」紙)

                                                                                                                                                                                        1977. 11. 14日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