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技術)만이 아닌 충만(充滿)한 정신(精神)세계의 마술(魔術)


멍든 땅에서 일어나는 안개 속에서 연무(煙霧)와 그늘의 장막에 덮여 나타나는 것은 무었일까. 또 제단에서 피워지는 향(香)의 안개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그 얼굴은...?


“무섭다기 보다는 오히려 거룩한 것, 모든 것이 그 때, 나에게는 상처 입은 인간의 얼굴로 보였다.”


이렇게 속삭이듯 말하는 남관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전쟁 때의 동경(東京)과 서울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통(苦痛)의 망령(亡靈)」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거룩한 망령이다. 왜냐하면 神은 항상, 희생을 요구하며, 시일이 지나면 공포의 격함이 새롭고, 그러면서도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낳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의 고통에 지쳐 섭리의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의 허약함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한다는 의미에서도 그 망령은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남관은 살육으로 가꾸어진 자기 만족, 고통과 신비적 황홀의 수치스러운 야합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설사 그가 이 흉측스러운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할지라도(그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가 일찌기 앙리 미쇼가 환기시킨 바 있는 「푸닥거리」 제식(祭式)에 따라 그 망령을 내쫒으려고 온 노력을 다하고 있다.

 


차라리 「색채의 망령」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 투명한 호박(琥珀) 속에 영원히 갇힌 곤충처럼, 그 망령을 캔버스 속에 가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꽃 핀 나무가 땅밑에 깔린 뿌리를 생각지 않듯이, 남관의 회화는 「惡」과 야합하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그것을 그려내고 더 나아가서는 영속(永續)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남관은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 죽음의 힘에 항의할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공포에 대한 음울한 관조(觀照)에서 벗어나 창조적 상상력의 놀라운 신기루를 받아 들인다는 길이다.

 


일찍이 앙드레 브류똥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정신은 집요하게 우리로 하여금 〈미래(未來)의 대륙(大陸)〉을 가꾸게 한다.” 이 〈미래의 대륙〉, 그것은 오늘의 인간의 불행의 무게로 해서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관의 회화에서 우선 눈을 끄는 것은 고도의 세련된 색채이다. 실제로 그는, 어쩐지 피상적인 기교의 숙달에 빠져 있는 빠리 체류의 일군의 극동(極東) 화가들 중에서도 빼어날 뿐만 아니라 헤프고 구제할 길 없는 탈진 상태의 이른바 「앵포르멜」 작가들의 내적 빈곤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청록색(靑綠色)의 반짝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명상(冥想)」을 유발하며 그것은 그린다는 행위 못지 않게 삶의 행위와도 관련된다. 그리고 갑자기, 마치 되찾은 낙원처럼, 부드러운 아침의 햇살 속에 고요하고도 장미빛 낕 한국의 언덕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죠제 삐에르

                                                                                                                       〈李 逸 譯〉

                                                                                                                             19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