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칼럼(42)

동행은 같이 길을 가는 것을 가리킨다. 물리적 동반말고도 같은 이념, 같은 일을 도모하는 관계도 동행이라 할 수 있다. 조형 이념을 같이 하거나 조형운동을 같이 펼쳐 나가는 경우도 동행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념에 있어서나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 서로를 이끌어주는, 그래서 목표에 이르는 길이 원만하게 진행되는 경우는 행복한 동행이 된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동행’(4.3-5.10)전은 이응노와 남관의 두 작가를 대상으로 꾸민 기획전이다. 같은 미술의 길을 걸은, 동시대 작가들이었다는 점에서 동행이란 어휘는 잘 어울린다. 다른 한편, 이들의 생시의 인간관계나 조형적 방법에 있어 과연 행복한 동행이었을까 생각하면 얼른, 그렇다고 대답 할 수 없게 한다. 70년 대의 일이니까 지금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일일테지만 이들이 벌인 모방논쟁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에겐 의아함을 감출 수 없는 심경임이 사실이다. 이들이 벌인 논쟁은 그 나름의 미술사적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모방의 내용과 한계가 어떤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논의해 볼 수 있는 장을 열어보였기 때문이다.

70년대는 모방과 표절이 심심치 않게 미술계의 이슈로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사건위주가 아니면 흥미위주로 다루었을 뿐 미학적 논의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신인도 아니고 미술계의 두 거장이 이 문제에 직면하여 나름대로 주장을 피력했다는 사실에서도 이 논쟁은 오래도록 기억될 만하다. 그러나 논쟁이 순조롭게 전개되지 못하고 종내는 이 전투구와 같은 양상을 들어내보임으로써 씁쓸한 뒷맛을 남기었다. 두 사람속에 김흥수가 끼어들어 남관을 공격하는 모양새로 바뀜으로서 남관 대 김흥수의 논쟁 아닌 인신공격으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다. 50, 60년대 파리에서의 한국인 미술가들 사이에 벌어진 여러 불미한 사건이 폭로됨으로써 애초의 모방 문제는 휘발되어버린 셈이 되었다. 논쟁치고는 참 이색적이란 인상을 남기었을 뿐이다. 논쟁의 단초는 이응노가 자기 작품을 남관이 모방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응노 특유의 문자추상을 남관이 도용하여 발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응노는 60년대 초 파리로 진출하면서 초기에는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비정형의 작품을 시도하다가 점차, 문자의 자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독특한 추상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이른바 문자추상이었다. 그런데 70년대에 오면서 일부 남관의 작품에서도자획의 결구로 이루어지는 컴퍼지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응노는 바로 이 계통의 남관의 작품을 두고 자기작품의 모방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남관의 반론은
문자의 조형적 원용은 이미 20세기 초두부터 여러 미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결코 이응노의 독창적 작업이 아니란 것이었다. 이응노의 반론이 나오기전에 김흥수의 등장으로 논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 것이 되었다.

유사성이 모방의 오해
이응노의 주장과 남관의 반론적 주장은 다 같이 맞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응노의문자추상과 유사한 점을 띠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방이 아니냐고 주장한 이응노의 주장도 틀렸다고 할 수 없고, 문자의 조형적 원용이 이응노에 의해 시도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문자에 의한 추상작업의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남관의 주장도 옳다.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두 작가의 작품이 갖는 유사성이 모방의 오해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논쟁이 일어날 수 있었지 않았나본다. 내가 보기엔 이응노는 오랫동안 서예를 겸비한 작업의 내역으로 문자추상의 독창성에 도달할 수 있었던 반면, 남관도 이미 60년대 작품상에서 흩어졌던 표현적인 요소가 점차 응어리지는 결구의 추상으로 진행되면서 문자추상과 유사한 결과에 이른 것이란점이다. 결국 두 사람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면서 종내는 유사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작가가 이 점에 초점을 둔 더욱 심층적인 조형방법과 의식의 전개를 피력해 보였다면 미술사에 남는 뛰어난 논쟁의 예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의 인간적인 관계가 다소 껄끄러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년에 도달한 주제의 일치에 있어선 훌륭한 동행을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름아닌 인간을 테마로한 작품의 공통성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을 향한 두 작가의 만년의 작업은 훌륭한‘동행’관계를 이루지 않았나 본다. 껄끄러웠던 인간적 관계가 이 전시를 계기로 해소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광수 / 미술평론가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초빙교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역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