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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화백



남관(南寬)은 191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14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935년 동경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하고, 이어서 2년간의 연구과정도 수료한 뒤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해서는 1947년 이쾌대(李快大), 이인성(李仁星), 이규상(李揆祥) 등과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9년까지 연례 회원작품전을 가지며 두드러진 역량을 내보였다.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지기도 하여 1949년 제1회 국전(國展)에서 일약 서양화부 추천작가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중 1952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에서 보게 되었던
제1회 일본국제미술전(일명, 도쿄비엔날레)과 파리의 살롱 드 메 동경전은 그뒤의 남관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954년의 프랑스행을 결행한 것은 그때의 충격적 자극 때문이었다.

1955년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 드라그랑드쇼미에르에 입학, 추상미술에 몰입하였다. 1958년 한국인 화가로는 처음으로
살롱 드메전(展)에 초대되고, 이어 H.아르퉁, A.마네시에 등과 함께 플뢰브화랑 초대전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
1966년 망퉁 국제비엔날레에서는 P.R.피카소, B.뷔페, A.타피에스 등 세계적 거장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수상, 확고한 작가적 위치를 다졌다.

같은 해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고, 1968년 귀국한 이래 국전 서양화 심사위원장, 홍익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파리를 중심으로 한 작품활동도 계속하였다. 서독 ·스위스 등 세계 각지에서 초대전을 갖고,
1990년 3월 제1회 도쿄 아트 엑스포에 출품하였다.

일찍이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가스통 디일로부터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남관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 특히 파리 화단에서도 널리 인정받은 작가이다.

그의 예술이 지닌 독자성은 서구적, 현대적인 방식을 통해 동양의 옛 문명에 속하는 소재들을 잘 융화하여 표현하였다는 데에 있다.
작품세계는 가시적인 것보다도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출해내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 생명의 영원성 등을 정제되고 세련된 색채에 담아, 인간상을 마치 상형문자와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1990년 3월 30일 사망하였다.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 파리 시립미술관, 룩셈부르크 국립박물관, 토리노 국제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작품에 《고향의 노인들》(1951) 《대화》(1963)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1965) 《푸른 반영》(1972)
《나의 친구를 위한 기념비》(1974) 등이 있다.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