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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여신 그림을 제작하고 있는 화가들, 1952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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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여신' 그림이 붙어 있는 부산 정부청사, 1952년 6월


  6.25전쟁 2주년 멸공통일의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의 공보처장 이헌구(李軒求)는 부산시청 벽을 장식할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라는 500호 대형작품와 포스터의 제작을 계획하고 이를 남관, 김환기, 김현승, 박영선 4명에게 위촉하였고 6월 24일 이를 전시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벽화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7월 혁명>과 구도가 같은 것이며, 깃발을 태극기로 고치고 인물을 군인으로 변경하였고, 벽화 우측에 있는 문어진집 장소에 남대문을 그려 넣었으며, 그 앞에 앉아 애기에게 젖을 주는 여인의 모습은 들라크루아의 <시호의 학살> 속의 광경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하여 모사 시비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같은 해 7월1일 오후 미화당에서 열린 <종군화가작품전람회> 전시회장에서 송혜수 화가가 전기작가 박영선에게 모사의 부당성을 지적하기에 이르렀고 박영선이 송씨를 박치기하여 송씨의 앞이빨이 부러지는 등 사회적 파장이 대단하였다.

  당시 공보부 처장이던 이헌구가 전쟁으로 생활고에 허덕이던 작가들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제작되었으나 김병기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밝혔고, 남관 역시 그 시점에 일본에 있었다고 했다.

  이후 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 참여한 작가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이화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씨의 논문을 통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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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건을 보도한 1952년 6월 29일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