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 1. 25 동아일보 5면에 실린 남관 화백의 예술가의 생성과정을 다룬 기사이다.


남관

모디리아니 나부상(裸婦像)의 그 감동

법륭사 벽화보고 정신세계로 승화

 

예술가는 항상 눈 뜨는 일을 멈추지 못하지요. 눈을 뜰 때마다 평범하던 사물이 새로워지니까요. 예술가에 있어서 개안(開眼)이란 곧 진보 아니겠어요.”

 

에의 탐닉과 창조 과정에 여러 고비가 있었음을 말하는 남관화백은 첫 번째 개안이란 말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32년전 동경 스끼야바시에 있는 화랑에서 모디리아니의 반신나부상(半身裸婦像)을 접했을 순간이라 말하고 싶다.”고 서두를 꺼낸다. 일본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니던 미술학도 시절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고향 경북 청송에서의 스트라이크 사건에 연루, 대구고보의 면학이 까다롭게 되자 에라 모르겠다.” 훌쩍 날아 앉은 곳이 동경. 경제학이나 정치학을 하자니 시절이 너무나 수상했다. 혼자 조용히 자기 것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예술 곧 미술이라 간단히 마음을 정리했던 이 초심자에겐 그때까지 화가엔 매력이 솟지 않았다. 마침 학교의 분위기도 아카데믹 일변도, 진부했다. 지루한 분위기 속에서 우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성적 뿐.

 

이럭저럭 학업을 마치게 되었던 마지막 해에 일본의 현대작가 콜렉쇼너 후꾸시마 시게다로(福島繁太郞)피카소」 「루오」 「마띠스등 쟁쟁한 현대화가의 작품을 몰아와서 전람회를 열었던 것이다. 미술학도라면 물론 의무적으로라도 가보아야 할 전람회였다.

 

그때 그 나체 앞에서 몸이 떨렸어요. 매력적인 작품이었어요그 감동 -  ! 이게 사실이로구나, 가슴에 맺혀 왔어요. 그 때 나이 이미 24세였으니 개안이 지각해서 온 셈이란다.

 

그래 그때부터 붓을 바로 잡고 당시의 실력자 구마오까의 회화도장에 비집고 들어갔다. 제전(帝展), 문전(文展)에도 입선했다. 작품도 사실적이었다.

 

그런데 2년 후 처음으로 법륭사에 갈 기회가 있었다. 금당(金堂) 사면에 그려진 벽화! 그건 한국사람이 그린 것이 완연했다. 한국의 혼을 그 속에서 보았다 할까, 사실에서 벗어나 좀 더 정신적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때 예술의 태양이 편애한 곳 빠리에서는 한참 포비즘(野獸主義)이 성행했다. 사물의 외형을 무시하고 모델 대상과의 사이에 왕래하는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그 타오르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그들의 왕성한 의욕에 그 자신도 몰래 빠져 들었다.

 

그때 이미 불 붙은 정열, 전쟁 때의 구마오까도장엔 석탄이 없었다. 오바 입고 구두 신고 장갑을 끼고 그림만을 그렸다. 손에 동상이 와도 아랑곳이 없었다. 해방 후 서둘지 않고 귀국했다. 47년에 지금 신세계화랑에서 첫 전람회를 가졌다.

 

피난시절이었다. 부산엔 일본신문과 소식이 넘쳤다. 51년 동경에서 비엔날레가 열린다는 소식도 그래서 알았다. 배를 타고 일본에 가서 그 거대한 국제전 마지막 날을 보았다. 프랑스것에의 흥미를 그때 느꼈다. 새로운 미술동향을 목격했을 때 하도 흥분해서 꿈은 무작정 프랑스로 향했다. 54년 도불(渡佛), 지난날 법륭사에서 받은 감각적인 동양에의 애정이 고독과 더불어 더욱 환상적이고 보다 가치관 위에 선 애정으로 변했던 것이다. <권영자(權英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