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남관 - 80년의 생애와 예술' 화집에 실린 글이다.


한국 추상화의 선각자

- 남관 회고전에 즈음하여 -

 

                                                                                             이 일 (미술평론가)

 

1

   한 사람의 화가로서 남관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그 생애는 곧 이 나라가 겪은 고난과 시련과 방황의 시기그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그의 예술적 편력은 사실상 우리 나라가 겪은 격동의 시대의 산 증언이라고도 할 수 있으려니와동시에 그와 같은 시기에 태동전개된 한국 현대미술의 발자취의 증언이자 또한 그 이정표이기도 한 것이다.

   우선 남관의 작가적 형성 및 그의 회화 세계 전개의 배경으로서의 시대적 상황 자체가 그로 하여금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한 예술가로서의 굴절 많은 편력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 단적인 한 예를 들건대그의 화가로서의 형성과 데뷔는 일본에서였고 8·15해방과 더불은 귀국 후에도 일본 화단과의 인연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다시 6·25 한국전쟁. 이 전쟁 기간 동안 남관은 종군화가로서 그 민족적 비극에 참가했고’52년에 다시 도일단 귀국했다가 2년 후인 ’54년에 다시 일본을 거쳐 이번에는 프랑스로 떠나는 것이다.

   남관의 파리 체류 기간은 무려 13년간에 걸친 것이며(나이로 따지자면 44에서 57세까지에 걸친한 작가로서는 가장 정력적인 성숙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69년의 귀국 후에도 서울에 정착하기는 했으되그의 활동 무대는 여전히 서울-파리를 오가는 것이다. 아니비단 서울-파리를 오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활동 무대는 거의 서유럽 전역에 걸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남관의 작가 활동의 배경을 감안할 때또 여기에 더하여 그의 다양하게 증폭되는 회화 세계의 양상을 감안할 때그의 예술적 전개 과정을 단순히 연대적으로 구분하거나 구획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단은 그의 회화 세계를 그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조명하는 데 있어 편의상 그의 활동 시기를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즉 제1시기로서 초기에서 도불 직전까지의 시기2기로서 체불시대그리고 제 3시기로서 귀국 이후의 시기의 세 시기가 그것이다.

   남관이 프랑스로 떠난 것이 1954년이고 보면그의 제1시기는1935년 일본 동경 태평양미술학교 졸업을 화가로서의 기점으로 삼는다고 했을 때일본에서의 활동 시기가 귀국 후의 시기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하고 있거니와실질적인 그의 작가적 형성의 배경은 일본화단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태평양전쟁(2차대전) 중에 그는 동경의 유수한 회원전에 출품했고 일련의 수상경력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남관의 화가로서의 형성기에 있어 당시의 일본 미술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본의 미술 풍토는 어떠한 양상의 것이었는가? ’20년대를 전후해서 패전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미술계는 각 분야에 있어서 서구 문화의 흡수라는 소용돌이와 함께 서구미술의 대대적인 도입에 열을 올리며 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에 뒤이은 20세기 회화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시기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포함한 이른바 에콜 드 파리의 영향이 짙게 깔리고 있던 일본 근대미술은 그 에콜 드 파리의 절충적인 성향을 다시 일본화시킴으로써 감각과 조형의 일종의 혼성적인 미술을 가꾸고 있었다.

   그와 같은 미술 풍토에서 성장한 남관은 또한 한국의 화가로서 식민지 시대 아래서의 태평양 전쟁과 동족상잔의 6·25전쟁이라는 두 차례의 고난과 비극의 체험을 살아야 했다. 이 전쟁의 체험그 중에서도 특히 6·25의 체험은 그에게 있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게 되며 그것이 그의 회화 세계의 하나의 기조로서또 영감(inspiration)의 뿌리 같은하나의 원천으로서 그의 작품 속에 두고두고 되살아 나는 것이다. 남관 자신이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두 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숱한 사체숱한 부상자를 보았다. 그들의 비틀어진 얼굴들은 꼭 고성의 무너진 돌담 조각 같았고오랫동안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석기시대의 부서진 유물들이 마침내 대낮의 강렬한 햇볕에 드러난 흠진 자욱같이 보였다"

(이와 같은 그의 술회는 언뜻 쟝 포트리에의 인질연작을 생각케 한다. 이 연작에서 보여지는 인질은 다름 아닌 나치독일의 점령 하에서 피살된 레지스탕스 동지들의 흙탕 속에 짓밟힌 얼굴들의 모습이었다.)

 

  8·15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그로부터 3년 후인 1948년에 귀국한 남관은 바로 그 해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54년의 도불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전까지 사이에 ’49’50년에 연이어 개인전을 갖는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해방 이후의 그의 작품 활동이 그만큼 왕성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귀국한지 불과 6년 만에 그는 다시 이역의 땅으로 떠나는 것이다.

   1954년의 도불기념작품전은 남관에게 있어서는 그 동안의 그의 작가 생활의 총결산이자 동시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는 전람회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이 개인 전에 출품된 작품은케탈로그에 의하면 총 67점에 달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사실적인 경향의 정물화풍경화누드로부터 후기입체파적 구성을 추구한이른바 반()추상  그리고 그 후의 추상 세계를 예감케 하는 서 정적 추상작품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 도불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불가능하나도불 후의 남관의 회화적 전개와 관련해서특히 추상적인 경향의 작품을 두고 볼 때당시의 그의 추상 작업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추상은 오늘날 우리가 뜻하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추상이라기보다는 마르셀 브리옹(Marcel Brion)이 말하는 이른바 추상화(抽象化)된 회화에 가까운 것 이었다.

   본래의 뜻의 추상회화란자연주의적인 모든 형태의 사사또는 환기를 거부하는 비대상(非對象)의 회화로그 자체로서 절대적인또는 결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 회화를 말한다. 반면추상화된 회화는 비록 객관적으로 추상적인 형태로 귀착된다고는 하되그 발상의 원천에는 어떤 실재의 대상(예컨대 자연)이 도사리고 있으며따라서 그 형태가 추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대상에서 추출 된추상 형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추상회화의 온상이 바로 전후 에콜 드 파리의 중축을 이룬 일꾼의 화가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ere)쟝 바젠느(Jean Rene Bazaine) 마네시에(Alfred Manessiere)에스테브(Maurice Esteve) 등등에 의한 이른바 서정적 추상회화이다.

 

 

2

   남관이 일본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55년 초의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 ’68년까지 머문다.

   ’50년대 중반이라고 하면 당시의 파리 화단은 미셀 타피에(Michel Tapie)가 선도하는 앵포르멜 미술의 열풍이 휘몰아칠 때이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앞서 든 전후의 ()에콜 드 파리파가 살롱 드 메(Salon de mai)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을 때이다.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나나 자신의 파리 체류 시기는 1957년에서 ’65년에 걸치며이 시기좀 더 넓게 잡아 ’50년대와 ’60년대가 프랑스 현대미술이 전후 전()시기 를 통해 가장 활성화되었던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

   이와 같은 와중에서 이미 나이 40대 중반에 접어든고국에서는 당당한 중년작가로 꼽히는 남관이 과연 어떻게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선 것일까? 더욱 그는 적어도 2차대전 후 우리 나라 화가로서 도불한 첫 케이스가 아닌가 싶거니와그야말로 먼 이국에서 홀홀단신이었던 셈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의 그의 작가적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편의상 우선 체류 시기에 있어서의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 훌어 보기로 한다.

   파리에 정착한지 한 해만에(1956) 남관은 파리시립근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현대국제조형예술전에 초대되고 그 2년후에 당시의 파리 화단의 중추적이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살롱 드 메(1945년 창설)에 한국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초대 출품하고 뒤이어 ’59’61’64’66년에 계속 초대된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으나당시만 하더라도 이 살롱에의 초대 출품은 일종의 화가로서의 공인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그리고 1966년에 유서 깊은 남불의 망통시에서 열리는 망통회화비엔날에서 1등상을 수상한다. (참고로 덧붙이자변같은 해의 이 비엔날에서 명예상은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대상에는 폴리아코프(Serge Poliakoff)가 각각 차지했다.) 그리고 1968년에는 그 비엔날에서의 명예 초대작가로셔 일종의 고별출품을 마지막으로 귀국의 길에 오른다. 물론 이 밖에도 파리 뿐만이 아닌유럽 각지역에서의 뀐위 있는 초대전에 한 해도 거를 틈없이 초대되며여기에 또한 1963년의 첫 개인전을 시발점으로 그 후 귀국 시까지 해마다 유럽 각지에서 개인전을 꾸미게 되는 것이 다. 어느 대담에서 남관은 자신의 파리정착 초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1955년 파리에 와서 정착했다. 그것은 서양미술을 직접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고국을 결코 등지지 않았으며 정기적으로 고국을 되찾곤 했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것을 단순히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하나의 인스피레이션의 원천 으로 삼고 또 하나의 윤리적지적정신적변혁의 계기로 삼는다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13년간에 걸친 남관의 파리 시대의 작품 세계를 더듬는 데 있어 우리에게 주어진 길잡이는 극히 제한된 범위 내의 것이다. 우리가 국내에서 접할 수 있었던 그의 파리 시대의 작품은 고작 1966년 신세계미술관에서의 남관 서울전과 그의 귀국 1년 후인 ’69년에 꾸며진 남관체불작품 전정도의 것이다. (또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나나의 서재 한쪽 벽에 변형 10호 정도 크기의 남관 작품이 소중하게 걸려 있다. 1965년 작으로서이 해 필자가 귀국 인사차 들렸을 때에 선물로 받은 작품이다. 비록 소품이기는 하되 남관의 당시의 원숙한 화풍이 농축된 작품이 아닌가 싶다. ).

   남관의 회화 세계에 대해서 현지(주로 파리)의 평론가들은 거의가 동과 서의 융합이라는 시각에서 평가하려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전 파리 국립근대미술관 부관장 베르나르 도리발(Bernard Dorival)의 경우가 그렇고,「살롱 드 메의 창설자이기도 한 가스통 딜(Gaston Diehl)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 한 예로 그들의 논평의 일부를 아래에 인용한다.

 

   “투명하고 무지개 빛으로그리고 완전히 융화된 남관의 마티에르는 이 한국화가가 서양의 화법을 몸에 익히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동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정묘하고도 세련된 감성에 뒷받침 되고 있으며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동과 서의 문화적 결혼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남관은 이 만남을 자연스럽게 드높이고 있는 것 이다. "(베르나르 도리발)

 

   “남관이야말로 서양 문화를 흡수하고 또한 동양 문화의 어느 일부조차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서 문화를 완전히 분리시킴과 동시에 융합 시키는거의 유일무이한 대 예술가라 생각된다. "(가스통 딜)

 

   이와 같은 평가가 반드시 일방적다시 말해서 동양 출신의 화가를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편향된 시각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남관의 회화 세계가 분명히 그와 같은 차원에서 한국 화가특히는 한국 추상회화의 한 선각자로서 독자적인 경지를 창출해 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동양 화가가 아니라한 사람의 화가로서의 그 곳 평가를 또한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 예로서 다음의 두 평론가의 논평을 다시 아래에 소개한다.

 

   “남관의 회화에서 우선 눈을 끄는 것은 고도의 세련된 색채이다. 실제로 그는 어쩐지 피상적인 기교의 숙달에 빠져 있는 파리 체류의 일군의 극동(極東)화가들 중에서 빼어날 뿐만 아니라헤프고 구제할 길 없는 탕진 상태의이른바 앵포르멜 화가들의 내적 빈곤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청록색의 반짝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명상(暝想)을 유발하며그 명상은 그린다는 행위 못지 않게 삶의 행위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조제 피에르(Jose Pierre))

 

   “남관 회화의 이미지들은 내적 세계의 반영으로서 스스로 용해되며실제로 그 세계에서는 과거가 상상적인 현존(現存)으로 승화되고 그 움직임 속에 미래가, 다시 말해서 깊이 새겨지고 체험되고파괴와 부재(不在)와는 아랑곳 없이 가꾸어지는미래 자체가 잉태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들 이미지는 감동적이고 때로는 엄숙한 거대한 벽화를 구성하고또한 거기에서 벽화를 뒤덮고 있는 시적 베일 밑에서 남관의 모든 고요한 향수(鄕愁)가 드러나는 것이다. "(앙리 갈리 카를(Henry Galy-Carles))

 

  남관에게 있어서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특히 추상화로서의 이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기는 서양화라고 했을 때그것 자체가 애시 당초 서양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했다. ) 남관은 자신의 추상 세계의 새로운 발굴과 전개를 위한 그것이 요구하는 표현적 어휘와 방법론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켜야 했으며실제로 그의 추상회화의 표현 기법 또는 재료와 마티에르 자체가 그의 회화 세계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서구적인 기법 등을 통해 그의 독자적인 공간이를테면 깊이에로 한없이 번지는 유현(幽玄)한 공간을 되찾을 수 있었거니와이와 함께 동양을 되찾은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도불 이후의 남관의 작품을 우리가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66년의 南寬서울전에서 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 간의 남관 회화의 변모된 모습과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 전람회에 즈음해 필자 자신이 또한 그의 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기회를 가진 바 있으며 아래에 그 일부를 옮긴다.

 

   “번지듯그 무엇엔가로 소생하려는 예감에 찬 그의 공간은 그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만의 특유한 삶을 가졌고 또 자신만의 생성의 논리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갖가지 흔적들이 마치 잊혀졌던 세월의 잔재물처럼 공간 위를 부유하고 또는 좌초(坐礁)한다. 분명히 그 공간은 시간의 주름살을 지닌 공간이다. 공간 속에 시간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양자는 다같이 무한 속에 용해되어 하나의 현실(Reality로 변신한다. 우리의 삶처럼 신비롭고도 불가항력의 현실로 그리고 그 흔적들세월의 흔적들남관의 회화는 바로 그 일그러지고 조각난 숱한 세월의 흔적들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것들은 먼 기억 속에서 헤여져 나온 상처들일까? 쓰라린 세월의 일그러진 열굴들일까? …… 그는 먼 이역의 땅에서도 고국의 영상그것도 쓰라린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영상에 집착하고 그것을 그의 예술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1966년의 서울전이 있은지 2년 후에 남관은 오랜 파리 시대를 일단 청산하고 귀국한다. 그리고 그 이듬 해에 자신의 체불 기간의 작업의 발자취를 어느 정도 훑어볼 수 있는 체불작품전을 꾸미며그 전람회는 그 규모로나 질적 면에 있어서 우리 나라 화단의 하나의 커다란 수확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작품 활동에 있어 자칫 끈기와 일관성을 잃고 안이함과 좌충우돌을 일삼는 우리의 화단적인 풍토에서 남관과 같은 끈질긴 자기탐구거의 구도자에 가까운 예술에의 집념은 그리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본보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추상회화의 세계는 단순한 감각적이고 표피적인또는 즉흥적인 조작(操作)의 산물이 아니라이를테면 시간 속에 매몰된 기억이 작가의 진실된 인간적 체험에 촉발되어 되살아 나온듯한 정신적 심층(深層)의 메아리를 생각케 하는 것이다.

   이 체불전의 작품을 통해 보건대대체적으로 남관의 추상 세계는 선명한 색채라든가 또는 명확한 형태 구성으로서 우리의 지각에 직접 호소해 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디까지나 암시적인 형상 내지는 이미지와 함께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색조의 섬세한 뉘앙스를 기조로 하여 유현 하고 은밀한 시적(詩的)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세계이다.허물어진 고적일련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바화면은 흔히 이끼 낀 자국과 오랜 세월에 그을린 듯한 바위의 표피또는 옛 돌담의 얼룩을 생각케 한다. 번지며흐르며 또 서로 침식해가는 이끼 빛과 비바람에 삭은 듯한 갈색 얼룩의 미묘한 조화는 그 어떤 원초적 세계잊혀진 세월에 대한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남관은 그의 작품에다 즐겨 시사성(示唆性)이 담겨진 표제를 붙이고 있다. 예컨대 허물어진 길」,「형성(形成)」,「황폐한 정원」,「환상적인 풍경」,「모놀로그등등이 그렇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이와 같은 심상적(心象的) 세계는곧 그가 또는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의 투영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의 개인적 체험이 그의 예술을 통해 시간 너머에서 되살아나고또한 모든 과거가 영원한 현재로서 그의 예술 속에서 하나의 엄연한 삶의 현실로서 재생하는 것이다.

   이국에서의 오랜 외로운 생활을 거치면서 남관의 회화 세계는 보다 내면적인 깊이와어떠한 망각의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는 내재적인 힘을 더해 간 듯이 보인다. 거기에다 광물성적인 견고하고도 윤택한 마티에르와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정묘한 변화로 풍성한 색채가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그 화면으로 하여금 명상적인 공간성을 지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여 그는 때로 연금사(練金師)의 솜씨를 연상케 하는 자유로운 색채 그리고 마티에르의 구사와 함께그의 내적 체험의 세계가 깊이를 더해 가거니와이미 사라진 것과 바야흐로 생성되는 무형의 공간에다 새로운 삶의 예감을 부여하는 환시자로서의 자세를 굳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3

   1968년에 일단 귀국은 했으나그 후에도 남관의 작가 활동은 실질적으로 파리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서울 자하문 밖 언덕바지의 아틀리에와 파리 몽마르트르의 아틀리에 사이를 오가는 생활이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되는 것이다.

귀국할 당시의 그의 나이 57우리 나라의 통념으로 따지자면 이른바 중진급작가요 또 실제로 그럴만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귀국하자마자 그는 마치 고국에서 화업을 다시 시작하기나 하듯이또 어쩌면 나이에 반비례하듯이 정력적이고도 폭넓은 작업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귀국 후의 그의 작품 활동의 무대는바로 위에서 지적했듯이 국내와 국외로 나뉘어지며국외 활동의 경우 ’68년 파리의 베르카메르화랑에서의 개인전을 필두로 어림잡아 1~2년 간격으로 해외에서의 개인전을 갖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국내에서의 남관의 활동 또한 그 못지 않게 왕성한 것이었으며 크고 작은 초대전 참가 외에도(그리고 작품 외적인 활동을 제외 하고서도) 개인전만 하더라도 7차례를 거듭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 되는 작품전으로서 들 수 있는 것이 ’72(현대화랑)’74(신세계미술관)’79(현대화랑)’84년의 호암갤러리(당시는 중앙갤러리라고 불리웠었다) 개관에 즈음한 기념전의 하나로 꾸며진 작품전 등이다. 그리고 여기에 두 회고전이 합세한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969년의 체불작품전」, 또 하나가 ’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꾸며진 회고전이거니와이 두 작품전은 다같이 남관 회화의 이정표를 세우는 것으로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전람회라 할 수 있다.

   1968년 이후의 남관그렇다면 귀국 후의 남관의 작품에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는가? 그러나 만일 그 어떤 변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어제 오늘 사이에 갑작스럽게 태어난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배후에는 그야 말로 그의 화업 반()세기가 깔려 있으며따라서 그에게 있어 귀국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 그 어떤 단절또는 비약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관의 회화 세계는 파리 시대이전과 이후 사이에 분명한 변화가 나타난다. 그 변화는 우선 화면을 물들이고 있는 색채에서 나타나고 있거니와 파리 시대에 있어서의 대체적으로 어둡고 응결된 듯한 색채=마티에르가 귀국 후에는 차츰 밝아지는 것이다. 동시에 까칠하던 마티에르가 색채 속에 용해되어 가고 화면 전체가 속으로부터 배어나오는 것 같은 때로는 신비스러운 후광(後光)에 감싸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단층적(斷層的)인 면에 의한 추상적 구도가 점차적으로 형상적(形狀的)인 이미지에 의해 대체되어 간다. 그리고 형상성과 함께 남관 특유의 복합적인 인간상다시 말해서 인체=얼굴=마스크 (가면)의 이미지가 그의 회화의 가장 핵심적인 조형적 어휘로 등장하게 되며 그와 같은 영상 세계가 때로는 상형문자화 되고 또는 기호화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스크상형문자의 형태는 ’60년대 말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나남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들 형태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갑골(甲骨)문자 같은 것을 더 변형시키면 마스크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야 기이다.)

   「인간성은 남관 자신이 되풀이 말하고 있듯이 그의 회화의 일관된 라이트 모티브임에는 틀림 없다. 눈들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고 비틀어져 있는 얼굴들…」,그러나 그와 같은 인간상 또는 얼굴(마스크)들이 ’68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반드시 상처의 자국」,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선음하다가 태양 광선에 노출되면서 그 더덕더덕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이미지요컨대 비극적인 이미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 동강이 난 인체또는 비뚤어진 얼굴들은 여전히 그러한 모습이면서도 비극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어떤 주술적(呪術的)인 삶을 누리고 있는 듯이 보이며더 나아가서 우주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삶의 공간은 때로는 다채롭고도 현란한 색채의 축제를 펼쳐 보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위에서 나는 인체=얼굴=마스크라는 길다란 합성어를 쓰기도 했으나사실인즉 이 세 낱말은 하나의 형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상형문자 또는 기호적인 요소가 가세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토막난 인체가 곧 상형문자요얼굴이 곧 마스크이고 얼굴이 곧 기호라는 이야기이며이 모든 것이 다같이 하나의 내재적 상징 체계에 속하고 있 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 체계는 인간 형상을 인간=기호로 환원시킴 과 동시에 그것으로 하여금 시간 너머의 환상적인 꿈을 살게 한다.

   (그리고 특히 ’80년 이후남관의 회화에 줄곧 등장하는 그와 같은 다의적인 인간 형상 속에서 얼굴=마스크가 때로는 나열식으로 화변 전체를 메우다시피 나타난다. 이는 아마도 남관이 그 동안 추구해 온 회화적 테마를 상징적인 차원 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한 조형 모티브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의 결과로 보인다. )

   귀국 후 남관은 오랫만에 약 1년 반에 걸친비교적 장기간의 해외 체류 시기를 갖는다. 그리고 1977-78년에 걸친 이 시기에 스위스 로잔느와 룩셈부르크에서 각기 개인전을 갖는 것이다. 이들 작품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1972-76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로서 로잔느에서의 개인전에는 유채과슈콜라쥬 등 40여점이 전시되었다. 이 전람회에 대해서는 현지에서의 반응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거니와 남관의 비밀 ­ 옛 문명에서 태어난 기호들이라는 표제의 논평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글귀를 읽을 수 있는 터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는 단숨에 추상과 구상을 연결하는 마무리의 솜씨와 특히 청색 주조의 색채 선택그리고 그 색채의 투명성유동성그리고 광휘성에 사로잡힌다. 이들 작품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클레(Paul Klee)의 작품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상기하게 된다. 기호상형문자흔적 둥이 그렇다. 읽기에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그의 작품은 솜씨 있게 다듬어지고 빈틈 없이 짜여져 있다"

 

  한편 룩셈부르크의 쿠터화랑에서 가진 남관작품에 대한 현지의 논평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남관의 작품에는 기실극동에 있어서의 소중한 테마와 유럽적 회화 표현의 성공적인 융화아니 차라리 공존(共存)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우선 형태의 아름다움유럽인들에게는 얼마간 생소한 상형문자적인 정교한 형태와 기호의 조종이 있고그리고 뛰어난 색채적 조화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작품들로 하여금 분명한 일관성과 우화적인 고요한 전율슬기롭게 얻어진 세련의 앙상블을 지니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련미는 청색과 백색의 색조 대비초록빨강보라빛 주조의 중간색에 의해 정묘하게 시사된 분위기에 의해 얻어진다.

색채의 반짝임그 색채의 아로새김과 아스라함에 있어 거의 인상주의 적인 색조의 변조를 지닌 그 반짝임을 통해 이 화가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형태들 속에서 우리는 때로 그 어떤 형상적인 암시를 포착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에서 보면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은 수수께끼에 싸인 메시지인 것이다"

 

   위에 든 해외에서의 두 작품전을 통해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눈여겨 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콜라쥬 작품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68년의 귀국 후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이 바로 이 콜라쥬 그리고 아상블라쥬 작업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하기는 콜라쥬아상블라 쥬의 한계 자체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의 ’70년 작의 어느 작품에는 콜라쥬=아상블라쥬라는 표제가 붙혀져 있기도 하다) 남관은 ’70년대 말경에 접어들면서부터 그의 오랜 화력으로 미루어 조금은 이색적으로 보이는 이 작업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기는 내가 아는 한그는 이미 1970년에 릴리프=콜라쥬작품을 제작한 바 었기도 하다.)

   이와 같은어쩌면 때 늦은 감이 없지도 않은 관심은곧 그의 젊음」,즉 고갈되지 않은 실험 의욕의 표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거니와사실은 그의 유채 작업에 있어서의 정묘한 마티에르 처리 자체가 콜라쥬와 데 콜라쥬(붙였다가 떼어내기)수법의 혼용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콜라쥬 작업은 그 동안의 그의 작업의 즉물화(卽物化)(오브제화)의 시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며이는 또한 그만큼 자신의 조형적 체험의 진폭을 넓혀보려는 이 노화가의 집념스러운 의욕을 다시금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남관을 두고 노화가라고 했다. 그러나 8순을 눈 앞에 두고도 결코 젊음을 잃지 않았던 노화가그리고 그 뒤에 실린 반()세기가 훨씬 넘는 예술에의 집념의 궤적이 깔려 있는 노화가이다. (이와 같은 남관의 연륜을 생각할 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수화(樹話)김환기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난다. 이 두 화가는 동세대동연배의 화가이자 다같이 우리 나라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독보적인 존재요또한 한국 추상회화의 선각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그리고 적어도 도불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관의 회화 세계는 당연한 일이기는 하되많은 변모를 거듭했다. 그러나 변모라고는 하되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선적(單線的)으로또 단계적으로 변해가는 진화론적 변모는 아니다. 그 변모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하며 증폭되고 증식(增植)해가는 삶의 체험적 생성의 그것이며더 나아가서는 그가 가꾸어 낸 꿈(남관은 그의 어떤 작품에다 도화사의 꿈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표제를 붙이기도 했다) 환영환상명상 그리고 축제에 의해 풍요로워지는 그러한 변모이다.

   우리는 이번에 고인(故人)1주기와 때를 같이하여 꾸며지는 회고전을 통해 다시금 남관의 회화 세계를 되새겨 보는 귀중한 기회를 갖게 된다. 바라건대고인의 그 도화사의 꿈이 후대에 길이 계승되어 더 한층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기를 기대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