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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서의 남관화백. 창고나 광을 개조해 만든 듯한 협소한 아틀리에. 채광도 시원치 않고 난방시설이라곤 연탄난로 뿐. 여기서 화백은 맨발로 창조의 불을 태운다.


畫家作品 南寬作品世界

 

南方人的藝術意志

 

                                                                                                                                                         吳   光   洙

 

   北方民族抽象作用

 

   허어버트 리드는 추상작용은 形而上學的인 불안을 지닌 북방민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에게서는 자연주의에 밀착된 예술을 보는 반면, 네덜란드인이나 독일인 그러고 러시아인에게서 강한 추상 의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등장한 이즘의 경향을 보면 그의 말은 쉽게 납득이 된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절대주의, 구성주의 운동이나 네덜란드 지방에서 전개된 신조형주의 운동은 북방인 특유의 抽象意志를 실현한 역사상 가장 뚜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각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추진되었던 표현주의 운동 역시 북방인이 갖고 있는 특유한 추상 의지의 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나치의 등장이 없었더라도 오늘날 추상 미술로 대변되는 현대 미술의 메카가 파리가 아니고 뮌헨이나 베르린이 되었을 것이란 추정은 따라서 확실한 신뢰로서 받아 들여진다. 무엇보다도 많은 추상 작가들이 북방출신이라는 점에서 리드의 小論은 확실한 근거에 떠받혀진다. 칸딘스키, 클레, 마르크, 라틀린, 몬드리안, 반되스버그, 반돈켈로, 마레바치, 파이닝거 등 추상 미술의 선구적인 존재들이 거의 북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다.

   南歐의 예술이 본질적으로 자연주의에서 벗어나지 뭇하고 있음은 인상주의와 추상파를 화해시킨 프랑스 예술의 의미 깊은 恒常性에서도 만나게 된다. 북방인들은 자연의 대상에서 출발하여 형태의 기하학적인 절대화에 도달되고 있지만 남방인들에게선 순수한 주지화를 통한 양식화의 의욕은 빈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대조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북쪽 사람들은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양식화의 의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남쪽 사람들은 주지화의 작업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화가 鄭圭는 북쪽 지역에선 동양화가가 없고, 서양화가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북쪽 지역이 이조시대 문화권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북쪽 지역 사람들의 체질에서 동양화가 벗어나 있다는 것으로도 이해 될 수 있다.

   남도 출신의 화가들이 색채를 잘 쓰고 잘 다루는 반면 북도 출신의 화가들이 색채보다 형태를 잘 다룬다는 그의 말에서도 역시 북방지역에서 볼 수 있는 강한 양식 의욕을 암시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보아 남도 출신의 화가들에서 유독 南畵的인 분위기를 많이 접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화가 南寬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전제를 내세우는 소이는 그가 누구보다도 가장 체질적으로 남방인이란 사실을 그의 예술이 웅변해주기 때문에서이다. 그는 경상도 사람일 뿐 아니라 경상도 사삼들이 체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종의 지역적인 항상성을 예술을 통해서 구현해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예술은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란 말을 즐겨하고 있다.

   이는 그의 예술이 자연에서 출발하여 추상적인 작업으로 기우러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추상 의지의 구현은 아니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또한 그가 프랑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와의 화해에서도 구체적인 단서를 발견케 하고 있다. 그의 파리 생활은 체질적으로 남방인이란 사실을 환기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값진 기간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悲劇的 체험의 영원성

 

   남관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던 요체는 비극의 체험이다. 인간 드라마의 비참한 체험이 그의 예술의 바닥을 흘렀으여 그 극한의 비밀들이 그의 예술의 실존으로서 남아 있다. 그는 두 번에 걸친 전쟁의 체험을 통해서 자기 예술의 한 구체성을 발견하였다. 전장에 쓰러진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가공할 단말마의 절규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형상을 발견한 것이다.

   즉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혹은 시간을 고정시키는 그 무엇(레벡크)으로 남아난 형상이다.비극적인 것이 극복되고 明證하기까지한 영원성이 들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원성을 획득하기까지엔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파리로 간 것은 54년이지만 어두운 체험들이 여과되고 재생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오면서이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이 파리에서 정당하게 평가되기 시작한 것도 대체로 이 무렵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을 메우는 어두운 마띠에르와 얼룩진 洞空斑點들이 형상의 여울 속으로 結構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의 비극적인 개념이 완성되어진다.

   이 비극적 개념의 완성은 그의 체험의 여파와 작품의 자율적인 형식과의 완전한 융합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기술적인 방법 정신이 그와 같은 체험을 담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기술적인 방법 정신은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무렵의 시대적인 추세와도 깊은 연관을 나타낸다. 54년에서 60년가지란 앵포르멜이란 뜨거운 표현 양식이 한 시대적인 흐름으로서 파상되고 있을 무렵에 해당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 기술적인 방법의 감동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그 역시 이 방법을 肉化되어진 형식으로 발전 시키는데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때로 응고되기도 하고 때로 번져 화면 자체의 확대보다 화면 내에서의 깊이를 만들어내는데 그의 특이한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 일종의 데칼코마니의 수법을 반복하여 색깔의 얼룩을 만들어 내면서 부분적으론 구체적인 포름을 만드는 방법을 병행시켜 의지의 부분과 우연의 부분과의 결합을 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기술적인 방법 정신이 앵포르맬의 표현과 불가불 어울리고 있음도 의지와 우연을 병용하여 새로운 재질이 주는 의외로운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방법이 서구적인 기법 자체에 매여 있지 않음은 그려한 기법을 지탱케 하는 요인이 다름 아닌 동양에의 유혹이기 때문이다. 그 유혹은 구체적으로 시간이란 개념으로 나타난다. .간 속에 무엇인가 끊임없이 떠오르고 또 침잠한다. 그것은 정지된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란 여울을 지닐 때 공간은 비로소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統御할 수 없이 공간 속에 떠도는 형상은 오랜 세월을 거처야만 비로소 정착하게 될 것이다. 이 무한한 지속의 관념이야말로 그의 예술을 豫感에 찬 예술로 특정 지워 주는 요인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시간의 단위를 부정하는(레벡크) 곳에 참다운 그의 예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새로운 질서화 기호의 감동화

 

   남관의 파리에서의 활동은 도불 직후인 54년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55년 프티 팔레에서 열린 재불 외국인 화가전과 이어서 열린 현대국제조형예술전의 참여가 파리에서의 첫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60년까지는 일종의 자기 발견의 시대로 치부할 수 있 을 것 같다.

   60년이후 마침내 분명하고 신념에 찬 방법의 완성은 앵포르멜의 기술적 방법을 받아 들이면서도 대부분의 개성적인 화가들이 그 고유한 조형 언어와 감동의 구성에 의해 이미 그와 같은 유산을 훌륭히 극복할 수 있었던 예를 같이 한다. 66년 망퉁 비엔나레에서의 대상은 실로 이와 같은 방법에의 완성에 주어진 정당한 보상으로 볼 수 있다.

   때를 같이 하여 그해 도불 이후 최초의 국내전이 마련되어져 그의 오랜 역정을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어두운 한 시대의 체험이 개인의 감동적인 구성에 의해 마침내 양식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69년 귀국전에 이어 70년과 72년에 귀국 이후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이 무렵의 작품들이 갖는 기조는 파리시대의 무리 없는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미 파리 시대의 비극적인 체험의 비밀은 찾아볼 수 없게 하고 있다. 그러한 비극적 체험 대신 화면은 생에 대한 어떤 종류의 안도의 숨결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있다. 처절했던 苦行精神이 극복되고 그 자리에 우주의 새로운 질서로서 유희정신이 어느새 비집고 들어와 있다.

   막연하게 떠오르던 형상의 지속적인 관념은 이제 분명한 골격을 가진 기호로서 대체되고 있다. 고대 중국의 象形文字를 연상케 하는 마술적인 書法이 공간을 장식한다.

   판독할 수 있겠금 분명하게 그 모습을 나타낸 이 상형문자들은 오랜 시간을 걸려 어둠을 뚫고 나온 어떤 형태가 빛 속에 그 모습을 은밀히 들어낸 것으로 비유 될 수 있을 듯하다.

   마치 동굴 벽화에 그려진 원시인들의 수렵도나 고대인들의 壁畫에서 볼 수 있는 행열도를 연상케 하는 기호의 나열은 그의 파리시대의 구성과 재질이 만들어 놓는 의외로운 가능성이 일체 배재된 채 무언가 엄격한 구성의 의지를 읽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적인 표현의 감동이 아닌 분명한 기호의 감동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과정은 구체적인 자연대상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대상을 완전히 해체한 후 그것을 다시 조심스럽게 재 결구시키는 방법의 지속이었음이 들어난다.

   자연의 대상에서 출발하여 형태의 기하학적인 순수화에 이른 북방계열의 추상 화가들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마치 사물을 상형의 기호로 置換했던 중국상형 문자의 형성 그것에 비길 수도 있다.

   상형문자는 절대의 추상 의지는 아니다. 그것은 또한 언제나 다시 구체적인 사물로 환원할 수 있는 그 자체의 구성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비밀은 그 문자를 기술하고 판독할 줄 아는 사람들에겐 무한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남관의 최근작들이 보여주는 건강한 結構는 이와 같은 즐거움에 지지되어 있기 때문임이 분영하다.

   하나의 상형 속에 의미를 심으려고 했던 문인화가들의 담백한 정신을 그의 최근작들에서 만날 수 있다면 역시 그의 체질이랄 수 있는, 또는 그의 추상의 항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南道 사람들의 체질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져 있음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美術評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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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언덕바지에 자리잡은 남관씨 댁. 3년 전 이사온 후부터 날씨만 좋으면 수리를 거듭했지만(창에 비치는 집) 고치고 나면 또 손볼 데가 생겨, 아예 금년 6월경 마당에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 설계에서 시공가지를 직접 지휘, 감독하다보니, 이제 일꾼들이 그가 없으면 일을 못할 정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