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8월 24일 경향신문 5면 인터뷰 기사
14년만에 「파리」에서 귀국한(18일) 남관화백은 신촌 와우산 기슭 조용한 2층집에 방 하나를 빌어들고 그립던 母國에서의 우선 한달계약의 하숙이란다. 그리고 10월쯤 「파리」에서 부인이 오는대로 적당한 곳에 집과 아틀리에를 구할 예정 - 記者는 아직 짐조차 들여놓지 못한 방에서 南화백과의 對話를 가질 수 있었다.
- 귀국하고 며칠이 되셨는데 그동안의 所感을 정리하면?
『14년만에 母國땅 金浦空港에 내리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짙은 냄새를 먼저 절감했다. 분명 鄕土를 의식케하는 그런 냄새였다. 그때 나는 이런 냄새가 있는 곳에 잘 돌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와선 또한 그때의 냄새로 해서 앞으로의 내 作品이 달라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문득하게 된다. 또 하나는 내가 「파리」를 떠나 美國으로 해서 돌아오는 동안 많은 國際空港을 보았지만 우리의 金浦空港처럼 소박한 풍경은 없었따. 물론 시설과 규모가 초라하지만, 그러나 그 소박한 좀에서 오히려 나는 뭔가 자극을 받은 것 같다.』
- 결국 高度의 現代文明과 인간적인 環境에 대한 해석이군요.
『새롭다는 것, 그것은 가장 옛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 발전한 現代文明속에서 살다보면 우리를 새롭게 자극하는 것이 가령 石器時代의 遺物인 경우가 있다.』
- 그러한 見解는 또한 선생님의 作品의 세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지금까지 表現하고 싶었고 또한 表現하고 있는 것은 形而上學의 세계가 아니라 形而下學 쪽이다. 낡아빠진 空間의 創造 - 그오래고 낡은 時空은 화려한 색채보다 炭色系에 가깝다. 그래서 나의 作品은 炭色系로 이루어진다. 가령 곰팡이가 피어있는 오랜 都市의 이미지라든지...』
- 몇 해 전 「망통·비엔날」에서 受賞한 作品의 타이틀이 그런거였다고 기억하는데...
『하나는 「太陽이 비친 모뉴망」, 또 하나는 「허물어진 遺蹟」이란 그림이었다. 극도로 발달된 유럽 文明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날이 갈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東洋的인 思索과 오랜 時間 및 낡은 空間에의 愛情이었다. 「뉴욕」에 가니 더욱 그런 것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의 作品에 담기는 나의 에스프리(정신)의 淵源은 東陽이다. 나는 西歐人이 아닐뿐더러 될 수도 없다.』
- 저쪽에서 南화백의 作品이 높이 平價된 것은 바로 그 東洋的인 要素였던 모양인데...
『그렇다. 평론가들은 나의 그림이 東洋과 西洋을 융화시킨 세계라는 말을 곧잘 했다. 특히 「파리」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베르나르·도리발」은 나의 作品의 그 점은 좋아했다.』
- 藝術에 있어서의 民族色과 國際色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무리 우리나라가 極東의 작은 나라이지만 世界文化의 추세, 곧 國際性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가령 歐美의 새로운 藝術形式을 비판없이 무질서하게 추종한다거나 영향을 받을 때에 생긴다. 外國것을 받아 들이되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면 밤낮 先進國文化의 뒤나 좇는 模倣文化만이 남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독특한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國際的인 것이다.』
-「포프」, 「오프」 그리고 「키네틱」 혹은 「라이트·아트」로 지금 歐美 美術은 어지러운 변모와 새로운 藝術形式을 맹렬히 쫓고 있는데 대한 생각은?
『그들의 현실과 생활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형식이고 운동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냐 하는 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에게서 필연적인 어떤 다른 형태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 國際展에 대한 생각은?
『그렇게 중요시 할 것이 못된다. 그 내막은 말할 수 없이 추잡하다. 모두가 국가간에 또는 美術商人들의 맹렬한 뒷 공작으로 좌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