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예술품 ‘구입’ 아리송/공개내역 뜯어보면…[한겨레] 1993-09-09 16면    3070자
◎“유품”“아내가…” 말흐려/값 안밝히고 목록 나열만/몇몇은 어림잡아 수억대국회의원과 공직자들이 집안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고서화 등 진귀한 예술품과 골동품이 이번 재산공개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지도층 인사로 행세하려면 예술품이나 골동품 한점 정도는 소장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번에 공개된 예술품은 규모가 엄청나다. 그러나 소장품의 평가액을 밝히고 공개재산에 합산한 공직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소장품들의 재산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일부 인사가 공개한 희귀 고서화나 골동품, 외국 유명화가 그림의 경우 진품으로 확인만 되면 ‘부르는 게 값’이어서 재산총액보다 가치가 높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클”수도 있을 정도이다.

예술품이나 골동품의 구입경위는 더욱 의문으로 남는다.

소장자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예술품에 조예가 있는 아내가 구입한 것” 등등 구입경위를 애써 해명하고 있으나 이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다. 혹시 뇌물성으로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청와대에서는 주돈식 정무수석이 소치 허련과 의재 허백련의 산수화 1점씩을 공개했다. 인사동 화랑가에 확인결과 주 정무수석이 소장하고 있는 산수화는 드물게 가로가 긴 것이어서 같은 크기의 세로가 긴 것보다 3배정도 비싸며 각각 1천만원을 웃도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혁규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미국에 있는 예술품 9점을 공개했는데 소장품 중 김흥수 화백의 20호짜리 그림은 5천만원을 웃도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 민정비서관은 김환기 그림 등 소장하고 있는 그림의 재산가치만 따져도 어림잡아 2억5천만여원에 이른다.

청와대 인사가 공개한 예술품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한영현 공보비서관이 소장한 살바도르 달리, 보나르 뷔페 등 외국 유명화가의 작품이다. 화랑가에서는 한 비서관의 소장품이 회화일 경우 국내에서 유일한 것이라고 보고 관심을 집중했으나 결국 1백만원에 거래되는 판화로 판명됐다.

한 비서관은 “10년전 중동에서 1백달러 정도를 내고 구입한 것인데 재산이 너무 없어 공개품목에 포함했다”면서 “판화라고 밝히지 않아 입방아에 올랐다”고 말했다.

행정부에서는 역시 외부무 공무원들이 예술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황병태 주중국대사는 운보 김기창의 동양화 2점과 청전 이상범의 동양화 1점을 공개했다. 황 대사가 소장한 그림은 각각 1천만∼2천5백만원 정도의 자산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준경 외무부 제2차관보는 중국작가의 그림 3점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으나 이들 동양화는 인사동 화랑가에서 거의 거래가 안될 정도로 헐값에 팔려 재산가치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이다.

국방부에서는 김재창 한미연합 부사령관, 도일규 수방사령관,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등이 소장한 예술품을 공개했다. 특히 도 수방사령관은 1천5백만원 정도에 거래되는 김창렬의 서양화 등 4점을 공개해 군인사 가운데 최다 예술품 소장가로 기록됐다.

박유광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이사장은 민영환의 사군자(8백만원 상당)와 추사 김정희의 서예(2천만원 상당)를 공개했는데 두점 다 ‘인기품목’이어서 짭짤한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이사장은 “선대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특별히 사모으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강동석 교통안전진흥공단 이사장은 도상봉의 50년대 서양화, 소치 허련의 1870년대 국란병풍 등 8점을 신고해 공개재산 5억5천만여원에 비해 많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화랑가에서는 소치의 병풍이 1천5백만원, 도상봉의 그림이 2천만원 정도에 거래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법부에서는 조윤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추사 글씨와 대원군의 난초가 아우러진 그림을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 그림이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문화재급으로, 2천여만원 이상의 가치를 지닐 것으로 평가되는데 조 판사는 이에 대해 “장인의 유품을 받은 것으로 진위 여부는 감정해 보지 않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박영무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청전 이상범의 산수화 등 동양화 4점을 공개해 사법부 안에서 예술품을 많이 소장한 편에 속했다.

박 부장판사는 소장 경위에 대해 “처가쪽 사람이 모은 것으로 재산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간직해왔으나 진품 여부는 모르겠다”고 밝혔다.

국회의원들은 상당수가 한점 이상씩의 예술품이나 골동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번 공개 때 예술품과 골동품을 전혀 신고하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김종필 민자당 대표는 르누아르의 그림과 시가 2천만∼3천만원에 거래되는 청전 이상범의 동양화 등 모두 6점을 공개했다. 르누아르의 그림이 진품으로 감정된다면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엄청난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 대표는 구입 경위에 대해 “안면이 있는 재일동포에게서 받았다”고만 밝혔다.

이기택 민주당 대표는 대원군의 난그림 등 4점을 공개했는데, 시가 7백만∼8백만원 하는 이 작품에 대해 “70년대초 출입기자가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팔려는 것을 사들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윤환 의원(민자)은 특히 이순신 장군의 휘호를 공개해 고서화 전문가들에게 가장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휘호에 대해 “만약 진품이라면 국보급으로, 부르는 게 값”이라고 평가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휘호는 일제 때 독립군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사품을 대량유통시킨 바 있어 가짜일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하며 관심을 나타냈다.

또 남평우 의원(민자)이 공개한 오원 장승업의 동양화 족자도 진품으로 밝혀질 경우 문화재급으로 2천만원을 웃돌 것으로 평가됐으며, 함께 소장하고 있는 김기창 화백의 청록산수화도 운보그림 중 최고액에 거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의원들 가운데서는 김봉호 의원(민주)이 허백련의 6폭 산수병풍, 이당 김은호의 화조도 등 모두 14점을 공개해 가장 많은 예술품을 소장한 것으로 손꼽혔다.

김진재 의원(민자)도 이응로의 그림 등 14점을 공개했으며 신진욱 의원(민주)이 허백련의 묵화 등 12점, 정재문 의원(민자)이 김환기 수채화 등 7점을 신고해 뒤를 이었다.

이상득 의원(민자)은 남관의 서양화 등 예술품 4점을 공개했는데 “아내가 그림에 조예가 있어 모은 것으로 진품여부는 감정한 적이 없어 모른다”고 말했다.<유강문 강석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