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 논문·평론 · 03

데생의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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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생의 여행, 記號들의 考古學 I. 데생의 여행 종이 위를 걷는다. 때로는 음악가처럼 흥겹게 박자를 맞추며, 혹은 병사(兵士)처럼 씩씩하게, 또는 농부처럼 땅을 파며 걷는다. 그러나 때로는 맹수처럼 뛰고. 굴고 혹은 곤충처럼 기어다닌다. 또한 장님처럼 지팡이(연필)를 앞세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의 기억 속을 여행한다. 보이지 않는 영감(靈感)을 모델 삼아 그것을 끝내 잊지 않고 잡으려는 즉, 기억하려는 갈망으로 끊임없이 추적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듯이 <순간적 인스피레이션을 잡는 힘을 갖지 못하면 미술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갈 것을 포착하려는 강박관념, 기억의 굴레 속에서 흥분된 맥박과 함께 종이 위를 걷는 것이 바로 데생의 첫 번째 여행인 것이다. 결국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은폐된 세계로 떠나는 걸음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눈에 보이는 자연을 모사하는 것보다 사물의 내면을 파헤치는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을 모사하는 것보다 마음 속에 있는 어떤 형상을 작가의 심상을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여진 사물을 재현하는 것과 기억된 사물을 재현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이 하나의 같은 영역처럼 화가의 연필 끝은 넘나든다. 부타테스라는 도자기공의 딸과 생긴 전설을 상기할 수 있다. 그녀는 연인과의 석별을 앞두고 벽 위에 떨어진 그의 그림자 모습을 새겨 놓기 위해 그 영상의 외곽선을 따라가며 그렸다. 그러나 까만 목탄 끝으로 조심스럽게 더듬듯 그림자 위를 그어 가기 위해서는 결국눈 앞에 있는 대상을 바라볼 수 없는 실명(失明)의 순간이 함께 한다. 이렇듯 무엇을 묘사하듯 그것은 이미 대상의 그림자이거나 대상의 기억을 추적하는 것일 뿐이다. 이때 데생은 추적의 대열에서 가장 선두에 진출한 첨병처럼 행동한다. 촉각을 곤두세운 예민한 더듬이처럼 손끝의 맨 앞에서 종이 위를 밟는다. 색연필, 흑연필, 크레파스. 목탄. 둥근 붓. 넓적 붓 등. 그 모양은 다양하게 변하면서 더듬이의 눈이 되어 준다. 데생. 그것은 더듬이(연필) 끝에 의존하고 떠나는 화가의 첫 번째 여행인 것이다.그 모습은 마치 캄캄한 밤을 어루만지듯 초조한 심경으로 팔을 벌려 휘젓는다. 암흑 속에 빠져든 육체의 불안감 속에서 피부는 오싹 오그라들며 보이지 않는 공간의 촉감을 느끼고 있다.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인 반사 작용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마치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서 출구를 잃고 헤매는 거동 같기도 한, 빛을 향해 찾아 나선 두 눈동자처럼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려는 열광의 눈빛이 번득인다. 이 눈 빛, 이 광명의 결핍증이 끝없는 데생의 여행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공포증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의 몸짓일 것이다. 창작의 영감들이 머리 속에만 갇혀서 꿈틀거리는 듯한 밀실 공포증, 자기 기록. 자기 제시를 잃은 듯한, 끝내는 자신을 볼 수 없을 듯한 실명과 죽음의 공포증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인 것이다. 이와 같은 거동에 대한 데리다(Derrida)의 관찰은 세심하고 흥미롭다. 즉, 장님의 손은 고독하고 격리된 모험을 한다. 경계가 잘 정해지지 않은 공간 속에서 손을 만져보듯 더듬고 탐색한다. 자국을 남기듯 공간을 쓰다듬고, 기호들의 기억과 시각(視覺)을 대신한 다른 기억들을 신뢰한다. 마치 그 형상은 손가락 끝에 붙어있는 눈꺼풀 없는 눈의 움직임 같기도 하다. 손톱 밑으로 바싹 밀어 붙은 눈, 하나 뿐인 눈. 애꾸눈 아니면 키크로페스의 거인 외박이 눈처럼 동그랗게 벌리고 있다.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을 인도하며, 글쓰기의 첨단에 서서 조심스럽게 서류를 작성하는 호기심 많은 대서인 처럼, 자기 자신을 불가시적인 천리안의 의안(義眼)처럼. 혹은 갱 속에 있는 석탄 광부의 이마에 달려있는 전등 같기도 하다. 글자들의 운동, 손가락 끝에 붙은 눈이 남긴 자국들, 그 모습은 의심할 여지없이 몸 속에서 윤곽이 잡혀진다. 보이지 않는 명령 센터의 전적인 철거 이후, 하나의 불가 해석적인 힘은 일종의 공동작용(즉, 두기관이 한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힘)을 확보하고 있다. 이 힘은 보고, 만지고, 움직이는 능력들을 조정하고 듣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데생하는 것처럼 이렇게 쓰고 있는 낱말들은 모두 장님이기 때문이다. 낱말, 어휘들은 언제나 들려지고 그 유성(有聲) 현상은 그토록 보이지 않게 남아 있는 것을 상기해야한다. 언어는 말해지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실명'을 뜻하는 것이다. 언어나 데생은 항상 우리에게 그것을 구성하는 '실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상기했던 특별한 경험 속에서, 또한 이미 있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도식들은 활기를 띄게 된다. 잠재적이고도 역동적인 이 도표는 모든 감각의 경계선을 통과하고 그 힘의 존재는 시각적이고 동시에 청각적이 된다. 데생은 화가의 손끝에서 고독하고 진지하게 탐색된 첫 경험들의 기록된 것이다. 첫 경험들, 화가의 성격, 기질 등이 담겨진 보고(寶庫),다듬어지지 않은, 수정되고 짐짓 꾸며지지 않은 것들, 화가의 본능적인 충동이 솟구쳐 나오는 것을 미처 억제하지 못하고 어떤 형식도 갖추지 못한 채 종이 위에 급하게 쏟아낸 참신한 고백들의 목록이다. 그의 생각대로 <예술이란 아주 본질적인 것. 작가의 사고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무형식의 것이 아닐까>반문해 본다. 붓과 물감. 색연필은 종이 위를 걸으며 자라고. 미끄러지며 놀고, 그 위를 밟고 디디며 산책한다. 창작의 자유권이 부여해주는 자율성의 기쁨을 무한히 누리며 그대신 외롭고 불안한 개척자를 위로한다. 데생은 예술가의 자유와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되고 어떠한행동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자신만의 왕국을 여행할 수 있게도와 주고, 홀로 사색하는 화가들과 대화하고 휴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주는 유일한 동반자인 것이다. Ⅱ. 기호들의 고고학 기호는 그것이 지시하는 어떤 것(즉 하나의 유사물)을 닳은 한에서만 기호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기호란 그 지시대상의 두 번째 유사성이오, 그 대상과는 다르지만 가장 가까운 상사(相似:서로 비슷한)의 형태인 것이다. 이와 같은 기호들이 어떻게. 무슨 법칙에 의해서 성립되었는지 식별해 보려는 탐구를 기호학, 그 기호들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과 기술의 총체를 해석학이라고 할 때(미셀 푸코), 16세기에는 이들 해석학과 기호학이 서로 중첩되어 있었으며 <자연>은 이들 중첩된 얇은 층 속에서 사물들끼리의 유사성 관계를 파악하는데 초점이 모여졌었다. 그러나 기호와 그 지시 대상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구름같은 불투명한 공간으로 가려져 있으며 <자연>은 바로 그곳에 놓여있는 것이다. 데생의 여행은(기호들의 고고학자 처럼) 태고적의 기호들을 만나고 그것들을 분석하고 수정하면서 어둠의 공간을 점진적으르 밝혀 보려는 지적 모험인 것이다. 이와같은 고고학적 풍상(風霜)을 점철해 은 기호들 예를 남관 데상의 숱한 이미지들에서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리는 것은 풍장을 이겨낸 인간얼굴이다. 얼굴 속에 숨어 있다가 때때로 어떤 형상과 만날 때 나타나는, 마치 가면을 쓴 듯한 인간의 얼굴이다> 다시 말해 데생은 '인간의 가면'을 쓴 풍화된 모습들이 기호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그림 거의 전부는 인간을 상징하거나 표상(재현)하 기호들로 얼룩쪄 있다 얼굴과 마스크, 인체와 상형문자들이 함께 얽혀 있다. 가면은 보호와 은폐, 변신의 의미가 있으며 다른존재와의 합일을 뜻하기도 한다. 종교에 이용되는 가면은 여러 얼굴로 나타나는 신의 초자연적인 힘을 상징하기도 하며, 흔히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 또한 죽음 경적을 예고하거나 악귀를 막아준다. 이들과 함께 어울려 그의 데생은 마치 연금술사 손에서 매만져지듯 신기하게 다듬어지고 기호들은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고 녹여진다. 이같은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인체의 정련(精鍊)과 영혼의 육화(肉化)를 꾀하듯 진지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특이한 인물들, 특히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별할 수 없는 '관을 쓴 양성인간'은 연금술사들이 상징하는 새로운 아담 같기도 하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근본이 혼합되고 유황과 수은이 결합되는 용광로의 실험들은 마치 종이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화가의 손처럼 신비한 영혼의 기호들을 탐구하고 있으며, 카발(Kabbale)주의자처럼 아담 카드몬(아직 아담과 이브가 분리되기 전의 태고적)의 영혼을 추적한다. 그의 데생은 또한 주술적 언어이기도하다. 다시 말해 부적(존)같은 힘이 있다. 신과 인간의 사이를 연결시키는 가교의 표시로써 상제(上帝)에게 올리는 상주문(上奏文)의 격식 같은 것이 보인다.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야릇한 그림 문자, 경면주사(鏡面朱砂)라는 붉은 빛의 수은 화합물의 단순한 그림들은 흉길을 조정하는 영험한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의 눈은 처음부터 신통한 능력을 지닌듯 인간의 역사를 꾀뚫어 보기도 한다 <나는 돌에서 참으로 많은 역사를 본다. 태고적부터 비바람에 씻기고 닮고 버려져 지금에 놓여있고 또 미래에도 남을 돌과 온갖 풍상을 겪고도 살아남은 인간의 얼굴이 비슷하게 여겨진다.> 그의 데생은 이처럼 태초의 인간. 우주적 인간 모습에 패한 접근을 시도한다. 그의 그림은 창조신화의 비밀을 누설하고 있는 마술사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인물들을 하나의 기호적 기능으로만보고, 그것이 상징하고 지시하는 것을 추적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의 데생은 주술적이고 변금술적인 기호들의 추구 이전에 조형의 탐색이 있었다. 다시 말해 조형적 기호들의 형식미와 그들의 질서를 연구하고 실험한 내용들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의 손은 종이 위를 산보하듯 천천히 걷거나 혹은 더욱 천천히 걸을 수도 있다. 그의 마음이 지나간 곳은 모두 선(線)으로 그려지며 물감으로 덮여지고, 벗겨지고 한다. 때로는 급하게 지나가며, 변덕스럽게 혹은 게으르게, 또는 짜증스럽게 손놀림을 한다. 글씨를 쓰는 듯 하다가 어느새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 하다가 어느덧 글씨를 쓰기도 한다. 사각형의 얼굴이 갑자기 해독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로 변한다. 두 개의 동그라미가 곤충의 커다란 눈처럼 있다가 벌써 어느 여인의 젖가슴으로 되었고, 얼마 후에는 자전거 바퀴로, 안경, 입, 생식기 등으로 둔갑해 버린다. 로마네스크 조각의 묵시록적 환상을 보는 듯 하다. 부질없이 떠돌아다니는 선들도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출현할 지 예측할 길이 없다. 삼각형은 모자처럼 머리 위에 얹혀 있다가 금방 산으로 바뀌고, 얼굴에 있을 때는 코처럼 혹은 귀걸이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변신을 거듭하는 기호들의 조립 인간, 거미나 개미처럼 팔 다리가 움직이는 벌레 같은 인물들이 종이를 잠식해 간다. 이렇듯 그는 간단한 기호들의 조형적 배치를 통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상징적 효과를 검토하기도 한다. 한편, 데생은 선을 긋는다는 가장 원초적인 회화적 사고의 표현이다. '그 본질은 자기현시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서 화가의 의도나 표현 형식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시해 준다. 현대에는 데생의 개념이 확대되었고, 더 이상 회화와의 구별을 원하지 않는다. 데생의 역사는 동굴벽화시대부터 있어 왔지만 한때 그것은 단지 미완성의 것이며 습작이나 밑그림 등, 부차적인 위치에 머무르고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 아카데미즘과 함께 '소묘'라는 엄격한 개념이 확립되면서 스스로도 하나의 작품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 회화의 작가들과 더불어 데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자기 충족적' 데생은 차츰 개념적 예술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가장 직접적인 '회화적 사고의 프로세스' 표현 방법이 되어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한다. 유럽에서는 앙리 미쇼, 드고덱스 등과 함께, 미국에서는 프란츠 클라인과 더불어 '기호 예술'이란 명칭을 부여받기도 했다. 이들의 그림은 서예의 한 획처럼 가늘거나 두텁고, 흘러내리거나 비틀거리면서 기호화되어 가기도 했다. 그래서'기호의 추상화'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사실상 서양이나 동양을 막론하고 기호에 대한 예술가들의 탐색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때로는 현대 미술에 사용되는 기호들과 동굴시대의 기호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앙, 클레 역시 나름대로의 태고적 기호와 함께 새로운 회화를 모색했다. 반면,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더불어 우연히 만들어진 기호들은 흔히 반예술적 의미를 갖고 다다이즘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텔라는 의도적으로 만든 직선의 기호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리려 했다. 오늘날의 데생과 회화는 하나로 결합되어 역사의 뭔점에 다시 서있는 느낌이다. 데생의 기호들은 그래서 가장 유서 깊고도 근본적인 회화적 표현 방식으로 함께 살아있다 그 속에는 시대를 뛰어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 전통이 되어온 상징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고 언어 이상의 세계를 말한다. 그들은 원초적이고 영원한 것을 선호하며 포괄적이고 개방적이기를 원한다. 사유의 바탕을 제공하고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제석, 관습들을 하나로 포용하기도 한다. 화가의 손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으며 늘 같이 사색한다. 무의식의 언어로 서로 공감하려는 것이, 현실과 꿈의 체험에서 추출해 낸 심층 언어이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의 고백대로 <나의 그림은 현실과 꿈, 기억과 만남이 형상화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을 통한 인간적 공감과 감동,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이라 믿는 것이다. 윤 익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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