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예술

일본유학에서 도불전까지

일본 유학 시절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의 기록입니다.통합 확인 자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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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예술

생명의 영원성을 향하여 남관은 인간의 얼굴, 갑골문자 등과 같은 기호들을 주로 작품의 소재로 택하였는데, 이것들은 단순한 기호로 여겨질 수 없다. 작품에 나타나는 형상들은 바로 인간성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론가 윤범모씨는 남관의 작품상에 나타난 형상들이 인체, 혹은 사람 얼굴과 비슷하며, 심지어는 읽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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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의 예술

초기의 인물화: 일본 유학에서 도불 전까지 1911년 청송에서 태어난 남관은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35년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구마오까(態岡)미술연구소에 간부로 있으면서 문전 등 여러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구체적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인물들을 많이 그렸다. 51년에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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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불시절

허물어진 고적 1966 옛 문명 기호의 흔적들: 도불 시절 남관은 프랑스 생활에서 이러한 경제적인 고통을 받았으나, 작업에 있어서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특히 파리에 머물면서 서구의 추상 미술을 접하게 된 그는 초기에 보였던 전통적인 구상 방식에서 벗어나 점차 형태를 없애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인간, 동물, 식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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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으로 돌아와서

인간의 형상들: 고국으로 돌아와서 프랑스에서 귀국한 시기인 68년 이후로 남관의 작품 세계는 또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는 <꼴라쥬 아쌍블라쥬>에서 보듯이 신문지 등을 찢어 붙이는 기법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형상을 명확히 지적할 수 없는 과거의 추상적 작업들은 점차 구체적 형상으로 대체되어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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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씨를 만나보고-장두건 1957.11.06경향신문칼럼

누구보다도 파리에 먼저 온 화가 남관씨를 만났다. 씨는 1955년 봄 이곳에 온 후로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동안 1955년과 56년에 파리 '국제미술전'에 출품했다. 그는 1년 전부터 생활의 곤란을 느껴오는 터이지만 그의 성격은 이를 견디어 왔다. 나는 어느 날 그의 화실을 방문했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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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굴

성북회화연구소 (경향신문 / 1947.09.12.) 화백 이쾌대 남관 이인성 등 전부 七씨를 지도교사로 하여 서울 돈암동 458-1에 성북회화연구소를 설치하였는데 연구부문 은유화 수채 「파스□□」이라 하며 입소자격은 학교출신 유무를 불관하고 소질에 치중하리라 한다. 남관미술연구소 (조선일보 1948.7.21.) 흑석동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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