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 · 소개 · 10

남관소개 조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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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사람, 남관의 그림을 들여다 보노라면 청갈색 혹은 흑색의 암울한 화면이 동트듯 환히 밝아진다. 화면을 가득 채운 기호들은 갑골문자, 혹은 상형문자 같기도 하지만 수목 신앙의 표출 같은 신라왕관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아픈 기억에서 눈부시게 찬란한 색의 섬광을 주저 없이 흡수해 낸 대예술가 남관. 청색을 주조로 한 서정적이며 동양적인 신비의 색채를 만들면서 고집과 외로움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마다하고 청렴결백한 구도자로 살다간 남관을 찾아 떠나 본다.

부남면 구천리에서 태어난 남관의 본명은 남구암南九岩이었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던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당에서 한자를 공부하던 어린 소년은 11살이 될 즈음 청송보통공립학교에 다니게 된다. 가난하고 수줍기만 한 촌 소년은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운동장 바닥에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그의 남다른 재능을 눈여겨 본 일본인 선생이 일본에서 공부 할 것을 권하였다. 가난에 찌든 촌 살림에 집안의 반대는 당연하였지만 남관은 몸만 가기를 고집하고, 14살 어린 나이로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와세다중학교 5학년 때 <고흐>화집을 보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본격적인 회화공부를 하면서 탁월한 데생 실력과 구성력을 인정받아 구마오까(熊岡)미술연구소에서 회화연구를 계속하였고 일본의 권위 있는 상을 휩쓸게 되면서 동광회 회원으로 추천되기까지 한다.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던 남관은 26살 되던 해 법륭사 금당벽화를 보게 된다. 이전 전람회에서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을 보았을 때, 불멸 같았던 사실의 감동에서 벗어나 좀 더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사물의 외형을 무시하고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남관의 새로운 정열은 온기 없는 작업실에서 동상에 걸려가며 오로지 그림만을 그릴 정도였다. 법륭사에서 받은 감각적인 동양의 애정이 고독과 더불어 더욱 환상적이고 깊이 있는 가치관으로 변한 것이다. 이 때부터 남관의 작품 성향은 구상 계열에서 벗어나 반추상화의 형태로 변모해가게 된다. 2차세계대전 때 동경 대폭격이 있었고 친지들이 폭사 당하는 끔직한 광경을 목격할 뿐만 아니라 아쉽게도 그의 초기 작품들이 대부분 소실되고 만다.

일본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잃어버린 아픔을 안고 해방과 동시에 귀국하여 청송에 3년 정도 머물게 된다. 낯선 환쟁이를 고향사람들은 신기한 듯 맞이하였고 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주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하의(1947)>를 비롯한 수 많은 작품과 영감을 안고 1950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나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게 남관의 숙명이라도 디는 듯 전시회가 끝나는 날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이 때 흑석동 화실에 보관된 작품들이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또 다시 겪게 되지만 그가 겪은 두 번의 전쟁도 남관에게서 붓을 빼앗지는 못했다. 고향인 구천 장터를 그린 <고향의 노인들(1951)>을 비롯하여 <농부가족(1951)> <귀로(1951)> <철야경자(1951)> 등은 모두 고향 청송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남관 예술의 텃밭, 전쟁과 고독

‘나는 두 차례의 전쟁(2차대전, 6.25동란)을 겪었다. 숱한 시체, 부상자를 보았다. 그들의 비틀어진 얼굴들은 고성古城의 무너진 돌담조각 같았고 오랫동안 파묻혀 신음하던 석기시대의 부서진 유물들이 강한 햇볕 아래 드러낸 흠집같이 보였다.’

6.25전쟁은 남관의 예술 궤도에 새로운 진로를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좌익계열의 조선미술동맹에 반하여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던 남관은 1951년에 김환기, 백영수 등과 함께 해군 종군화가단을 조직하여 전쟁터를 누비게 된다.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참상과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로 벌판에 널부러진 병사들의 모습에서 경험한 갖가지 주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천태만상의 인간상은 후일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두 차례의 전쟁이라 는 비극적 체험은 그의 작품세계가 인간의 원초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해 가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만든다.

1.4후퇴와 더불어 부산에 모여든 난민들은 황량한 겨울바람에 몸을 맡겨야 했다. 영도이발관 2층에 거처를 마련한 남관은 김환기, 이중섭과 특히 가깝게 지냈는데, 일본으로 처자를 보내고 용접공 일을 하던 이중섭과는 통영에서 몇 년간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다. 이중섭을 돕고자 당시 문화국장에게 이중섭의 그림을 소개하였으나 결국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남관은 이후 프랑스에서 열린 「외국인 화가전」에 작품을 출품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매도한 사건, 가장 친하던 이응노 화백과의 작품 모방사건, 영국 전시를 빙자한 그림 사기사건, 전시회 작품 도난사건 등으로 인하여 사람을 전혀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창살에 가둘 뿐만 아니라 결국 세상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를 유배하며 이룩한 예술의 세계

‘일본에서 공부한 것이 모두 허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울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서양화라고 가르친 것은 모두 기교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마흔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피난시절 일본국제미술전에서 서양의 미술사조를 접하고는 국제미술계로의 도전을 작심하였다.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도불전을 뒤로 하고 배 편으로 세 달이나 걸려 프랑스에 도착한 남관은 시인 보들레르가 묻힌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바로 뒷집 헛간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돈이 없어 미술관 무료 개방날짜에 맞춰 몇 시간이고 걸어가서 바라보는 대화가들의 그림은 자신이 여태껏 배워 온 회화세계가 전혀 쓸모없음을 절감하게 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소통할 방법조차 찾지 못한 그는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근대미술의 중심지 파리의 한복판에서 오히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싸구려 빵과 우유, 감자로만 연명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머리가 모두 빠진 채로 창작에 몰

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결과 자신이 겪은 전쟁과 유럽의 전쟁 후 사회적 상황이 필연적으로 결합해 비로소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체험에서 온 심상적 心想的 추상과 기호적 記號的 문자추상이었다.

동서양을 모두 껴안은 유일무이한 대예술가

전쟁의 비참함이나 옛 문화적 유물들을 연상시키는 그의 어두운 회색조의 화면은 우연적이면서도 세련된 얼룩들로 점철돼 타시즘(얼룩주의)이라는 이름표를 부여받기도 했다.

금욕주의적인 일면이 있던 남관의 추상은 그의 개인적 성향과 예술적 관념이 혼합되어 동양에서 온 고독한 예술가의 영상으로, 때로는 은둔자의 비현세적인, 또는 유아독존적인 고독의 모습으로 비치게 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살롱 드 메’에 초대되어 작가로서의 인준을 받게 된다. 1966년 프랑스 망퉁에서 열린 세계적인 회화비엔날레에서 피카소, 타피에스, 뷔페 등을 제치고 기념비적인 작품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이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현대미술의 거장 타피에스가 명예상에 머물러 그의 대상 수상은 더욱 빛났다. 남관으로 하여금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의 확고한 성공을 상징케 한 이 작품은 작가의 내면적 시각과 독자적인 조형성 및 정신적 특성을 은밀하고 매혹적인 색상의 분위기로 대단히 깊이 있고 세련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것은 <동양의 풍경>이 한국인 최초로 파리국립 현대미술관에 상설 전시된 것과 함께 그의 생애에 가장 큰 보람을 안겨준다. 남관의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전쟁의 기억이 민족적 문화와 더불어 상형적 기호의 인간상으로 소생하여 <허물어진 고적> <공포>와 현재 청와대 상춘제에 전시되어 있는 <정> 등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작품의 경지에 이른다. 세계적인 비평가 가스통 디일은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예술가’라는 극찬을 하였다.

남관의 작품은 마음의 상을 보고 그린 사실화다.

내 작품의 주역은 인간상 人間像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인간상이지요.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의 영원성이 담겨있습니다.’

유럽에서의 크나큰 성공을 안고 1968년 귀국한 남관이지만 유난히 깐깐한 성격으로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해 고립되는 등 인간으로서는 많은 풍상과 외로움을 겪게 된다. 17회 국전심사 때는 입상작 선정이 사전 담합된 것을 알고 심사장을 뛰쳐나와 문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타협을 모르는 그의 예술가적 고집은 국내 화단과 갈등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고,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 1983년 예술원상 후보에 올랐으나 서류제출마저 거부하기에 이른다. 을지로의 철물상을 구경하는 것 외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로 작품에만 전념하던 그는 <문자와 공간> <회고> <옛형태> <보라색 자색의 반영> <은색 구성(룩셈부르크국립미술관)> <묵상> <폐왕의 환상(국립현대미술관)> <일그러진 형태Ⅱ> 등 걸작들을 쏟아내며 ‘마음을 그리기 때문에 내 그림은 추상이 아니라 마음 속에 보이는 사실화’라고 주장한다.

1968년부터 10년간 홍익대 미대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타성에 젖은 자신을 학대하기도 했던 남관은 우체통에 넣은 연하장이 예의가 아니라며 다시 찾아와 직접 건네주기도 하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과 전시활동을 하던 그는 작품 사기 사건으로 절필까지 생각하였으나 1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수많은 작품을 그려내는 열정으로 「푸른 회상전」으로 불린 예화랑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삐에로> <달과 삐에로> <옛뜰인상> 등 다분히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들은 그가 비로소 질긴 고통에서 벗어나 생명의 영원성을 느낄 정도로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다.

산과 들, 새와 구름처럼 직관적인 형태가 있으면 쉬우련만 남관의 작품세계는 추상적이다. 매우 표현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그의 작품세계는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수수께끼 같은 상형문자 형태의 메시지가 쉽게 해독되지 않았다. 동서양의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이 지닌 낯설고도 친숙한 이미지와 깊고 복잡한 신비에 도달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 과거와 미래, 동양과 서양의 대립형식이라는 독법마저 제시해 왔었다. 하지만 <얼굴들(1988)>에서 나타나듯이 남관의 작품은 생의 희노애락, 생명의 영원성처럼 바로 인간과 삶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상화가라고 불리는 것을 탐탁찮게 여기던 대화가 남관. 세계 화단에 충격으로 다가와 당당히 이름을 올렸지만 조국에서는 타협과 조화에 서툴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우한 대예술가 남관. 그는 전쟁과 인간의 고통에서 비롯된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창작열을 뒤로 하고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간직한 채 79세를 일기로 고향 청송에서 안식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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