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화백 · 남긴 글 · 15

이그러진인간상의비밀 남관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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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이그러진 人間像의 비밀

남 관

『<화가는 혀를 잘라 버리고붓으로말해야 한다〉고 마티스는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작가가 자기자신을 위해 말을 필요로 한다는 것처럼 쑥스러운 일도 없겠지요.』

응접실에 앉으니 저 멀리 삼각산의 봉우리가 커다란 유리창문으로 가득히 들어 왔다.자하문 밖의 성 밑인 종로구 부암동 338의 32. 73세라는 고령임을 전혀 짐작조차 못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남관화백은 말했다.

- 이번 중앙일보사는 창간 19주년을 맞아 신사옥을 짓고 중앙갤러리를 개관하여 그 기념전의 하나로 선생님의 작품전을 갖게 되었읍니다. 대략 어떤 작품들이 출품될 예정입니까.

『중앙갤러리가 단일 전시공간으로는 국내최대(400평)라는 점에 입각 그동안 커다란 기대 속에서 대작을 완성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흑백상黑白想」이라는 작품(265x728cm)을 비롯 약 60점의 신작을 준비했읍니다. 대부분이 1백호 이상의 것으로 「오늘의 남관」을 보여 주는데 아쉬움이 없도록 애썼었읍니다만 어떨지 모르겠읍니다』

-작품제작은 주로 어떤식으로 하십니까.

『그동안 일체의 외부와 단절 두문불출하면서 작업장만을 지켰지요. 게다가 저는 잠이 없어 하루 3시간의 수면과 약간의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자연히 화실에 있는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무리한 작업을 지탱할 만한 무슨 건강비결이라도 있었읍니까.

『웬걸요. 여지껏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늙었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없었읍니다. 크게 아퍼 본 적도 없었고요. 굳이 건강관리라면 산책과 점심시간 후 20분 정도의 낮잠을 들 수 있을런지요. 하지만 이번 좀 무리를했더니 그만 몸에 이상을느끼게 되었어요. 병원신세도 질만큼 주의 신호가 오더군요. 앞으로도 이번과 같은 대작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 이번 전시회의 명칭을 보면 부제로서「창작 50년의 예술세계」라는 말이 들어 있읍니다. 한 작가에게 있어 반세기 이상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 왔다면 결코 예사스런 일은 아니라 믿습니다. 우선 화가에의 길은 어떻게 해서 이뤄졌읍니까.

『동경에 있는태평양미술학교(본과)를 졸업한 것이 1935년이니까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시작한지 벌써 50년이 되는군요.

원래 시골(경북 청송)의 부모님은 미술공부하는 것을 반대했죠.

하지만 소학교시절에 그림을 그리면 선생님께서 자꾸 뽑아줘 은연 중 「미술적인 분위기」를 조금씩 쌓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특히 후에끼라는 담임선생께서 「화가는가난하다」라며 들려주신 이야기가 늘 인상에 남아있었지요. 즉 어떤 가난한 화가가 목탄데생때 지우개 대신 쓰려고 식빵을 사가지고오니 마침 화가에게 마음이 있던 빵집의 딸이 생각해서 값비싼 팥고물 빵으로 대신 넣어 주었대요. 나중에 그림을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먹을려고 산 것이 아니니까요』

- 도불을 전후에서 화풍이 바뀌신 것 같은데요. 언제 구상에서 추상회화로 전환했으며 그 무렵의 작품활동은 어떠했읍니까.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구마오까(熊岡) 미술연구소에서 간부로 있으며 문전(文展)등 몇몇 전람회에 출품했지요. 이 때는 주로 인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수상작 속에는 일하는 노인상들이 있었지요.

해방 이듬해에 귀국하여 48년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후 49년과 50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열었지요. 6·25 피난 시절에 은사인 후꾸시마 시게타로(福島緊太郞) 선생의 초청으로 도일, 53년에 동경 포름화령에서 개인전을 가졌었읍니다.

당시 동경에서는 매일신문주최의 대규모 국제전이 열린바 있었는데 저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지요. 현대미술의 명품들을 보고 뭔가 생각을 달리 갖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이 때 도불渡佛을 결심케 되었지요.

귀국하여 54년도에 추상 계열의 작품 반을 포함한 50점을 가지고 도불전을 열었지요. 그후 한 달 가량의 배를 타고 프랑스에 도착하니 55년초가 되었지요. 그해 6월 재불외국인작가전이 열렸는데 저는 「고향의 노인들」 (25호)이라는 작품을 한 점 냈었죠.』

- 그후 파리에서의 다채로운 작품 활동을 하신거로 알고 있읍니다. 특히 제6회 망통회화비엔날레(66년)에서 피카소,뷔페,아르날,피숑 등 거장과의 경쟁 끝에 1등상을수상한 쾌거도 있었읍니다. 파리생활은 어떠했읍니까.

『처음 몇년간은 고생이 많았죠. 노동자들이 사는 허술한 집에서 겨우 연명하며 그림만 그렸죠. 파리생활 초기의 고생이란 이루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뒤에 살롱 드 메에 초대되어 출품하게 되니까 화상들이 찾아오고 점차적으로 이 곳 저 곳에 출품할 작품제작 의뢰가 넘치게 되었지요. 그 무렵부터 나의 작업에는 형태가 안보이기 시작했죠. 원래 예술이란 것은 파고들면 들수록 승화되어 표현형식이 이른바 추상적이기 쉬운거죠. 하지만 남들이 나를 보고 추상화가라고 쉽게 부르지만 나는 그말을 좋게 생각안해요.

(언젠가 폴 클랭의「남관의 비밀」이란 글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나를 추상화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몇천년을 내려온 내 고국의 오랜 테마들,즉 돌,고대古代 유품,데드 마스크,나아가서는 옛 식물무늬 등 옛 문명의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것을 현대적인 묘법으로 옮기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그러한 묘법이 생소해 신비스럽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아니라고 생각한다.

-작품상에 나타난모티브는 무엇이었읍니까.

『나는 내 생활주변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읍니다. 길가의 돌맹이나 낙엽 혹은 하늘의 달이나 별 등… 이들이 모두 그림의 모티브가 되죠.

<나의 그림은 그러한 (머리 속을 오가는경험) 현실과 꿈,기억과의 만남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젊은 시절에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 그림의 모티브는 자주 전쟁의 기억에서 온다.

벌판에 쓰러진 젊은 병사의 얼굴,토막나 뒹구는 팔다리,시체 위로 쏟아지는 햇볕, 전란으로 우왕좌왕하는 군중의 모습… 얼굴,얼굴들을 나는 길가다가 땅위에 구르는 이끼 낀 돌 위에서도 보고 고궁의 퇴색한 돌담에서도 본다.

나는 돌에서 참 많은 역사를 본다. 태고적부터 비바람에 씻기고 닳고 버려져서 지금에 있고 또 미래에도 남을 돌과 온갖 풍상을 겪고도 살아남는 인간의 얼굴이 비슷하게 여겨지는 것,이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얼굴이다. 얼굴 속에 숨어 있다. 때때로 어떤 현상과 만날 때 나타나는 기억들을 뽑아내서 마치 가면을 쓴 듯한 인간의 얼굴을 그리게 된다.> (남관 「꿈의 나라」 조선일보 1973. 10.27)

- 겉으로는 추상화된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작품 내면에 흐르는 주제 같은 것은 인간이란뜻입니까.

『내 작품의 주역은언제나 인간상人間像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인간상입니다. 이는 6·25라는 전쟁을 겪은 이후부터 뚜렷해진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이 인간상 속에 생명의 영원성을 표현해 보려고 시도했었습니다.』

(<동양 사람들이 어떤 사물의 성격을 명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마스크 속에는 시간을 초월한,혹은 시간을 고정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 이렇게 시작하며 프랑스의 비평가 장 작크 레벡크는 말한 바 있다.

〈흔히 감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예술이 죽어버리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감정이란 오직 감수성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요,아무런 영구적인 것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갈등 - 남관의 예술은 강철로 연마된 그의 영혼의 소산이다. 그같이 심한 분노와 소동과 절규,공포와 죽음을 목격한 후,영혼을 지향하는 그의 마음에 무엇이 남았을 것인가 – 오직 저승의 문턱인 무덤과 사원寺院이 있었을 뿐이다.

남관 마스크의 아름다움은 저 신비로운 Paques 섬에 있는 조각들의 아름다움이요, 또한 침묵에 잠겨있는 성스러운 우상의 아름다움이다.>)

- 같은 인간상 속에도 여러 가지 특성이 있겠는데 왜 하필이면 이그러진 형상으로 나타납니까.

『나는 표면에 나타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싫어합니다. 깨끗하거나 치장된 것 보다는 근본적인 것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꽃을 보더라도 싱싱하게 만개한 꽃보다는 시들은 꽃을 더욱 좋아합니다. 벌레 먹은 꽃이나 서리 맞은 꽃에 남다른 애착을 느낀다는 말이지요.』

국전國展 1회 때도 시들어진 꽃을 그려 낸 바 있지만 아마도 어떤 생명력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쟈코메티의 조각을 보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육체를 보이고 있지요.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상, 굉장히 비참한 인간상입니다. …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작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남관의 작품은 천태만상의 인간세상으로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에 나타난 시한부의 인간상이 아니고 여기서 비춰진 내면의 인간상들이 생동하고 있다. 거기에는 군상群像이 있고 집단이 있고 사회가 있고 고립된 상像이 있으며 남녀노소의 희로애락, 비애, 고독, 허무, 정情 등이 엇갈려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현실적인 상像의 변모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성의 표상으로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천태만상을 낳게 하는 원천인 인간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일견 마스크 또는 갑골문자甲骨文字로 보기도 쉬우나 마스크와 갑골문자는 대상의 감각적 자극의 특성이 위주로 된 상형이다.> 임영방林英芳 「남관의 창작세계」)

- 말씀을 듣고 보니 작품상에 나타난 형상들이 인체가기도 하고 사람 얼굴 같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읽을 수 없는 상형문자까지도 사람의 모습과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비록 가시적인 형태로서 구체성을 갖고 있진 않읍니다만…. 그렇다면 인간상이란 테마를 캔버스에 표출해낼 때 특별히 유념되는 사항은 없습니까.

『문제가 된다면… 작품은 우선 아름다워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용은 그 다음입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지요. 아무리 비참한 세계를 표현한다 할지라도 색채로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지요. 그림에는 색채가 중요합니다. 내 그림에는 초기부터 요즈음가지 형태가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색채만은 비중을 갖고 있지요.

- 오랫동안 작업을 하셨는데 그동안 어떤 작가의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읍니까.

『셰잔느입니다. 학창시절부터 세잔느의 분위기를 좋아 했읍니다. 특히 그의 「붉은 조끼의 소년」같은 작품에 깊이 빠졌던 생각도 납니다. 동경에서 구마오까상을 받은 것도 세잔느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읍니까.

『이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작업을 해야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한 작업이 모두 헛일인 것만 같아요. 한 20년쯤 젊거나 또 더 살 수 있다면 뭔가 제대로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지껏 한번도 늙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 파리에는다시 안가십니까.

『이번에 FIAC(국제현대미술 견본시見本市)에 출품도 하여 잠깐 다녀 올 예정입니다만 계속 서울에서만 살 겁니다. 지금 이 집의 화실이 너무 좁아 (어떤 시인은 창고라고 표현했다) 내년 쯤 이사 갈 예정입니다. 도대체 20평도 안되는데다가 비가 새는 형편이니 작품하기가 곤란해요.』

- 남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옆에 앉아 침묵을 지키던 남 화백의 반려자께 질문했다. 소설가 김진옥金眞玉씨. 「성북동비둘기」김광섭 시인의 따님이다.)

『20여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요즈음에 와서야 겨우 깨달은 게 있어요. 저 분은 한마디로 ‘비현실적인 사람이다’라는 느낌이예요.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누구와 타협을하나…. 매우 엄격한 성격으로 도대체 중간적인 요소가 없어요. 저하고는 기호품까지 다를 정도로 정반대의 성품인데 여지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적과도 같아요.』

(남화백이 「비정치적」이어서 손해 볼 때가 많다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진정한 의미의 예술 및 예술가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그동안의 고충을 밝히기도했다.)

남화백은 말했다. 웃으면서.

『앞으로 할 것이 있는데 우선 칼라 텔레비죤을 살 것과 그리고 때로는 자동차도 갖고 싶어요.』

(그러면서도 끝내 작품걱정을 잊지 않았다. 여지껏 무엇을 이룩해 놓았는가 생각하면 답답해지기만 한다고. ) (1984. 10)

/ 정리·윤범모尹凡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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