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화백 · 남긴 글 · 04
나는왜파리를떠났나 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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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파리를 떠났나
남 관
파리의 온상溫床과 병상 病床
파리는 예술가를 길러줄 수 있는 온상溫床이 될 수 있으나 그와 반대로 병상病床이 될 수도 있다.
한번 파리 도취병 陶醉病 걸리면 아편 중독자처럼 돼버린다. 그래서 파리의 멋에만 젖어 버려서 형식적이며 유행적인 일만 하다가 실패하는 작가가 많다. 파리에서 예술 공부를 하려면 정확한 비판력과 각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불굴不屈한 노력만이 파리에서 인정을 받을수 있는 길일 것이다.
파리에 있는 미술가의 인구가 10만명이라고 한 것은 수년 전에 『아아르』주간지에 발표된 숫자인데 이렇게 많은 미술가들이 파리에 살고 있으며 그 모두가 큰 포부를 가지고 파리에 모여든 것이다.
그 가운데서 파리 도취병에 걸려 멋만 내다가 낙오자가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매일 아침 카페에 앉아 파이프를 들고 카페오레(커피에 우유를탄 것)와 크로와상(반달 같은 모양의 빵)을 즐기면서 신문을 보는 멋도 파리 아니면 즐길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잘못하면 만성慢性이 되는 일이 많다. 친구들과 모여서 아침 5시까지 카바래에서 밤샘을 하는 화려한 파리에만 흥미를 가지게 되면 일을 할 시간이 없어진다. 자기의 방향을 찾지 못한채 자기가 지난 작가적 체질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새로운 경향의 것에만 흥미를 가지다 보면 자기의 것을 못하고 실패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가장 새로운 것은 가장 고유하며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사고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이 파리병病에 걸리기 쉬운 것이 이 때문이다.
1953년에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베르나르 도리발(그 당시 부관장)이 내 작품을 보고 〈살롱 드 메>전 위원들에게 추천한 편지에 나를 파리에 있는 많은 외국인 화가들 중에서 가장 파리를 잘 알고 일하는 작가라는 말을 쓴 구절이 있다.
나의 파리 생활
나는 작가란 자기 작품에 대해서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해 왔기 때문에 자화자찬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다만 내가 파리에서 일하는 동안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자부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969년에 나의 체불전滯佛展을 본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겠지만 1955년부터 68년까지의 작품들은 내가 파리에 가서 변해온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56점 진열된 중에서 한 점이라도 다른 작가의 그림에 유사한 것은 없었으리라고 믿는다. 그처럼 내 작품 한 점, 한 점이 내 자신이고 나의 절실한 내면묘사라고 생각한다.
예술인촌藝術人村을 떠나서
67년에 나는 또 룩상부우르와 독일에서 두 개인전을 계약하고 문자 그대로 주야晝夜를 잊어버리고 일을 했다. 그 결과 체중은 줄어들고 심한 불면증에 걸렸다. 의사는 나에게 휴식을 가라고 권했다(나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것을 나 자신도 느끼고 있었지만 두 개인전을 위해서 작화作畵하는 동안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무척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휴가를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보내고 9월에 돌아오니 또 새로 생긴 화랑 베르까멜에서 68년 봄에 나의 개인전을 하자고 했다. 나는 그것이 좋은 조건이었기에 승낙 하였다. 그런데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지만 나는 이 예술인촌을 떠날 생각이었다.그 이유는 백여명의 예술가들이 한 집에 수년 동안 함께 살고 보니 모두가 한 집 식구처럼 친해져서 수시로 만나게 되니 이렇게 바쁜 나에게는 대단한 지장이 아닐수 없었던 것이다.
화실을 구하기 어려운 파리에서 그같이 좋은 조건을 갖춘 화실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교우交友 위해서 나의 작화 시간을 빼앗긴다는 것은 나의 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여서 나는 좀 더 고독히,조용히 일할수 있는 화실로 옮기기로 했다. 그래서 다시 프랑스 정부에 상의를 했더니 마침 파리시에서 소유하는 화실을 하나 얻게 되었다. 나는 무척 즐거웠다. 그 화실은 몽마르트르 부근에 있는 7층 집인데 아주 조용했다. 내 화실 문을 열면 몽마르트르가 눈앞에 보이고 밤이 되면 몽마르트르 위에 있는 사크레거얼 사원의 조명이 한층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아파르트망 생활
나는 이 화실에 홀로 틀어 박혀 마음껏 일해보기 위해서(그러나 또한 밤까지도 일하지 않기 위해서)아파르트망을 따로 빌려서 통근을 하면서 68년 봄에 있을 전람회를 위해 일을 시작했다. 매일 아침 여덟시에 집을 나가 화실에 가서 저녁 일곱시면 일을 끝마치기로 작정한 규칙적인 생활이었지만 때로는 일의 형편에 따라서 저녁 아홉시가 넘을 때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피로에 지쳐 모든 것이 싫어지고 그저 작업복을 입은 채 아틀리에 있는 침대 위에 쓰러지고만 싶었다. 그럴 때면 틀림없이 아내로부터 걱정스러운 전화가 온다.
아파르트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화실 문을 열고 나오면 중천에는 둥근 접시 같은 달, 먼 눈 앞에는 둥근 지붕의 사크레거얼 사원이 일류미네이션에 비쳐 희고 신비롭게 보인다. 나는 갑자기 심호흡을 한다. 이 7층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은 마치 천당에서 하계下界로 내려가는 기분이고 신선한 공기에 피로는 좀 회복되는 듯,이 높은 지대에서 저 유명한 춘희 椿姬가 잠들고 있는 몽마르트르 묘지를 지나서 크리쉬 광장을 내려가면 이 유흥의 광장은 다채로운 인간의 분포도分布圖다. 이 광장을 지나서 뤼드크리쉬에 있는 카지노 드 파리쪽으로 더 내려가면,내 아파르트망이 있다. 이런 생활이 68년 3월에 내가 개인전을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부터 나는 이 3번째의 파리전展이 끝나면 의사의 말과 같이 건강을 위해서 수 개월간이라도 파리를 떠나 휴양을 해야겠다고 명심했다. 그 대기 오염 속에 있는 파리 시민들은 모두 휴양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나의 일을 위해서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는 일을 하다가 화실에서 쓰러졌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나를 즐겁게 해주기도 하였다.
즐거운 피로
10월 중순부터는 매일 회색 하늘이 아니면 부슬비 내리는 날씨가 겨울 동안 계속된다. 고층건물들의 지붕 위에 열을 지어 서 있는 굴뚝에서 나오는 석탄 개스 냄새를 맡아 가면서도 파리의 지붕 밑을 떠나지 못하고 그 아름다운 큰 공원 같은 수도首都와 생애를 같이한 외국인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에게는 생명을 해치는 개스 냄새,인파,수많은 자동차에서 나오는 소음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나도 그 외국인들 사이에 끼어서 파리를 떠나지 못한 화가였던가보다.
파리쟝들의 말에 의하면 2차대전 전의 파리만 해도 조용하고 아름다운 수도였다고 한다.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인파를 싫어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도 뉴요크나 런던보다는 아직도 나으니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는 노인들도 많았다. 나도 다른 외국인 예술가나 늙은 파리쟝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67년에 스페인에 있는 마요르카 섬에서 여름 휴가를 맑은 공기 속에서 보내고 돌아온 후로는 파리의 공기가 한층 더 탁하게 느껴져서 틈만 있으면 나무들이 많은 세느강변이나 공원으로 산보하러 나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건강을 위해서 얼마 동안 파리생활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세느 강변에 있던 화실에서 18구區에 있는 몽마르트르 화실에 옮긴 후 몇몇 전람회 준비로 일은 한층 더 바빠지니 자연히 화실을 나가지 못할 뿐더러 밤에도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로에 지쳐 집에 돌아갈 기력조차 없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몽파르나스에 있을 때 경제적으로 고생하던 시절과는 다른 즐거움에 가득 찬 피로였었다.
내 화실에서 집(어파아트)으로 가는 길을 파리를 아시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한다면 당르몽 Damremont가街에서 몽마르트르 공동묘지 다리를 건너서 크리쉬 광장(영화관과 유흥장이 많고 이 부근에 삐갈, 무우랑 루우쥬가 있다)을 지나 카지노 드 파리 쪽으로 내려간다. 화실에서 걸어서 15분, 산책을 좋아하는 나지만 이 길만은 버스를 이용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나는 이 묘지(불행한 사랑으로 일생을 끝마친 춘희의 무덤이 있는 곳) 위를 통하는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것이 무척 싫었던 것이다. 특히 겨울이면 파리의 거리는 오후 6시면 어둡다.
죽음에 대한 생각
내가 화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대체로 8시쯤인데 이른 봄 어느 저녁일이다. 보름달을 머리 위에 맞이하면서 이 묘지 위의 다리를 지날 때 나는 먼 동양에서 온 사람으로 유달리 고독감에 사로잡힌 일이 있었다.
달과 묘지... 나는 묘지 위에서 죽음에 대하여 철학적인 사고를 해 본 일은 없었지만 이날 밤,생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어 달밤 묘지 위를 지날 때 생을 위한 모든 노력... 명예,지위,사랑,혹은 재력을 위한 노력이 허무한 일이라고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달을 볼 때 과학적인 해석을 하고 묘지를 보고 인생이 끝나면 쉬어 가는 곳이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생은 중요한 것이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들처럼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묘지 위를 건너간다는 것은 초현실적 화가의 꿈이 아닌 현실이 있으므로 생에 대한 노력을 허무하게 느꼈고,죽음을 묘지 위에서 둥근달을 통해서 일찍 정들은 고국에 연결 시켜 본다.
‘사가보월청소립思家步月靑宵立’이었던가, 달을 통한 나의 환상은 고국산천에 직선으로 이어지는 동 시에 이 복잡한 현대문명의 도시를 피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나는 또 습관적으로 화실에 들어간다. 전날 그리던 화폭을 보고 불만을 느끼고 다시 붓을 들고 전날의 구성을 뜯고 색의 위치를 바꾸어 보는 동안에 또 다른 착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다른 새 화폭에 옮겨본다. 그러는 동안 또 다시 자기도 모르게 종일을 화실에서 보낸다. 전날 밤 월광月光 밑묘지 위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던것과는 정반대로 자기가 가장 생의 의의를 아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생을 위해서 일을 하는지 일을 위해서 생의 의의가 존재하는지 이런 어려운 문제를 나는 모르지만 인간의 생존가치는 오로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행복했다.
일에 몰두하다가 화실에 쓰러진다면 화가로서 얼마나 위대한 순간일까.
깨틀어 버린욕망
3월 28일부터 4월25일까지의 파리전展이 끝날 무렵,서독(함부르그)과 스페인(바르켈로나)에서 나의 개인전을 원한다는 교섭이 왔다.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나의 파리를 떠날 의도는 흔들렸다. 나의 건강보다 작가로서의 영예가 더 중요했던 것일까?
아내는 나의 욕망을 책망하면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 파리를 떠날 것을 강조했다. 그러는 동안에 이번에 드골 대통령의 하야下野의 원인이 된 프랑스의 5월 소동이 일어났다. 5월15일부터 전국에 파동波動된 노동파업은 학생 데모와 합류되어 6월 중순까지 파리를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미술관과 화랑들도 문을 닫았다. 각 기개機開에서의 Piquet de greve(데모를 방지하는 대원들)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 상태가 나를 파리를 떠나게 만든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나는 2,3개월 예정으로 미국 미술계를 보기로 했다. 떠나기 1주일 전에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도리발씨에게 인사를 갔다. 미술관을 점령하려는 데모대(주로 미술가들)를 방위하는 수위실에서 전화를 하였더니 곧 올라오라는 씨의 말이였다. 관원館員들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감시대원들을 지나서 관장실에 가니 씨는 문을 열고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내가파리를 떠나서 미국에 몇 개월 가있겠다고 했더니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떠나는 이유는 건강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더니 그때야 씨는 지금 당분간 미국에 가있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6월 9일에 뉴요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미술관과 화랑을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뉴요크에는 If Art Gallery Magazine~ 에 나와 있는 화랑만 해도 1백50여개나 되는데 파리에 있는 화랑과 비교해 볼 때 모두 큼직하고 좋은 설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거기에 걸려 있는 작품들은 그 현대식 설비에 비해서 빈약한 것 이었다. 그 중의 몇 화랑이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운동의 작가들만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 무척 미국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작가들이란 의식적으로 유럽의 전통 (특히 프랑스의 전통을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케네스 노오랜드 Kenneth Noland,고툴리이브Gottlieb의 생기있는 색채의 작업이 어떻게 보면 지오메트릭한 방법인 것 같지만 그 필적筆跡이 캔버스 위에 번져 나가는 효과는 마치 종이에 먹墨이 번진 동양화적인 인상을 주어 지오메트릭한 것을 캐머플라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전통적인 수법을 무시하고 동양화에서 풍기는 담담한 효과를 노린 것이다.
‘자! 권총을 들라’
이 외 리히텐슈타인Lichtenstein,자스파 죠온즈Jasper Johns,톰 웨슬만Tom Wesselmann,로오젠키스트Rosenquist 같은 사람들은 새로운 아메리카니즘의 창조를 부르짖으며 작업을 해 온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리히텐슈타인 같은 사람은 작품 속에 언어까지 사용하면서 에꼴 드 파리를 공격 하였다. 예를 들면 ‘Now,mes enfants,pour la France!’라는 문구를 넣고 권총을 든 청년상을 검은 한 색으로 표현한 그림을 나는 보았다.
이 그림은 ‘자,얘들아,프랑스 공격에 나서자’하는 의미를 표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슬로건은 좀 심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하나의 방향제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통에 대한 이같은 의식적인 도전으로서 전통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진 미국 화단을 정당화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그들이 지금 의식적으로 에꼴 드 파리를 공격함으로써 그들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또한 오랫동안의 유럽 숭배에 이별을 하고 그들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려는 눈부신 노력이 눈에 띈다.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들이 주장하는 미국적인 회화운동은 무척 가치 있고 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뉴요크 뿐만 아니라 어느 지방에 있는 도시에서도 많은 미술관과 화랑에서 에꼴 드 파리의 대가들의 작품들이 판을 치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뉴요크 현대미술관이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또는 구우겐하임미술관 Guggenheim Mus-eum에는 많은 에꼴 드 파리 대가들의 작품이 수장되어 있고 뉴요크를 위시한 미국의 이름 있는 화상들 역시 그 대부분이 에꼴 드 파리 대가들의 작품을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결 국 미국의 미술애오가와 작가들이 에꼴 드 파리를 숭배한다는 표시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미국화가들은 에꼴 드 파리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여 오늘날의 미국화단을 형성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좀 심하게 비판한다면 그들은 아직까지도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앞에 든 몇 작가들이 미국적인 회화운동을 일으키고 의식적으로 프랑스 화단을 공격하려고 하는 점을 그들의 앞날의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척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테크놀로지칼한 것이나 키네틱 아트Kinetic Art,해프닝Happening운동 혹은 인봐이런멘털 아트Environmental Art, 엘리멘털리즘Elementalism, 산업적인 입체조각같은 예술운동은 어느 나라에서 먼저 싹이 텄던 간에 그것은 문제 삼을 것 없이 그들만이 유럽의 문화전통을 무시하고 할 수 있는 대담한 운동이었으며 벌써 이 운동들이 국제적인 것으로 번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한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그들이 풍부한 물질문명 속에서 현대의 산업문명의 혜택을 무한히 받을 수 있는 조건 밑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해 버리면 문제는 간단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설혹 프랑스가 그들과 같은 풍부한 산업문명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전통을 존중하는 프랑스인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운동이 아닐까?
뉴요크에는 많은 미술관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위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이다. 여기서 미국이 낳은 빛나는 화가 잭슨 폴로크Jackson Pollock의 대작은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고, 데 쿠우닝DeKooning의 대작 역시 폭이 넓은 역작이었다. 루이즈 네블슨Louise Nevelson, 톰 웨슬만 2세, 노구찌의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이 미술관이야 말로 현대적 설비를 자랑할 수 있으며 미국출신 작가들의 것만을 진열하고 옹호하는 특수한 미술관이다.
미국여자 같은 미술
2차대전 후 에꼴 드 파리의 대가들이 파리에 생활 근거를 두고 경제적인 보장을 얻기 위해서 뉴요크에 있는 화상이나 수장가들과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있었듯이 도오꼬에서도 마이니찌,요미우리, 아사히 등 큰 신문사들은 문화사업으로 피카소를 위시한 많은 에콜 드 파리의 대가들의 전람회를 끊임없이 열고 수년전에는 마뜌Mathieu,생 프란시스San Francis와 같은 그 당시에는 전위적인 젊은 작가들의 전람회가 성공리에 끝난 후 부터 타산이 빠른 일본화상들은 파리에 있는 화가들과 연락을 시작했다. 따라서 파리에 사는 많은 예술인이나 일본을 동경하는 외국인들이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들 중에 세계의 미술동향을 좀 아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도오꼬는 파리나 뉴요크와 다름없더라는 말을 하였다.(이것은 파리에 있는 일본인 화가들 자신도 말하고 있었다) .
내가 파리에 있을 때 그들이 현대미국미술을 평할 때 폭은 넓지만 그 외에는 아무 내용도 재미도 없는 그림들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마치 미국여자 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은 있지만 현재의 뉴요크 화단이 파리 화단같다는 말을 들은 일은 없었다. 여하튼 그들에게서 일본 현대화단이 이런 평을 받는다는 것은 일본 미술계의 주체성을 가진 발전을 위해서 슬픈 일이다. 이것도 파리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수년전에 루브르박물관장이 일본 미술계를 보고 어떤 자리에서 도오고오 세이지東鄕靑兒만을 좋게 평했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내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경솔한 주석柱釋을 붙일 수는 없지만,그가 루브르관장이니 만큼 일본의,명치시대明治時代부터 프랑스가 일본미술계에 큰 영향을 준 본가라는 것을 아는 그로서 일본의 소위 아카데미즘부터 현대의 동향을 본 결과 도오고오 셰이지만을 칭찬한 본의本意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클라시시즘의 본고장인 루브르박물관의 관장으로서 그가 일본의 클라시시즘이나 아카데미즘을 인정할 리가 없을 뿐더러 더우기 일본의 현대미술에는 한층 더 흥미를 잃은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68년 귀국 도중에 주로 일본의 현대미술계의 동향을 살펴볼 생각으로 1주일 동안 도오꼬에 머물렀는데 도오꼬 현대미술관과 여러 화랑에 걸려 있는 일본 작가들의 그림들을 본 인상을 솔직히 말해본다면 본질적으로 파리도 아니고 뉴요크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국적불명의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탁월한 기교가 주는 하나의 새로운 방향제시였다. 이 기교야 말로 세계 어느 나라의 화가들에 못지 않는 젊은 기술공들의 솜씨였다. 수년전에 비엔날 드 파리에서 일본의 젊은 작가들이 입상된 것은 그들의 창조적 가치보다도 보다 탁월한 기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꽉 막힌 추상예술의 앞길의 타개를 모색하는 오늘날에 있어서 몰각된 예술정신에 불안을 느낀 심사위원들이 다른 나라의 출품작에 비해서 그들의 월등한 기교가 눈에 띄었을 때 매혹적인 찬성을 할 수 있었던 분위기와 동양이라면 일본을 먼저 생각하는 서양인들에게 인식되어 있는 국가적인 배경도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리한 그들은 평론가와 작가들이 합심해서 이런 유리한 시기를 이용해서 앞으로 국제화단에서의 위치를 높일 것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진정한 대변자代辯者
오랜 역사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모든 예술가들은 정신성 속에서 살다가 그 정신성의 사도使徒가 되어 숨져갔다. 중세기의 예술가들은 오로지 신의 정신을 받들다가 숨져 갔고,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신에서 해방된 인간의 정신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근대에 와서 표현주의表現王義 작가들은 그 정신성을 한층 더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극적인 면을 즐겨 그려냈고 2차대전 이후에 갑자기 전 세계의 화단을 휩쓴 추상주의抽象王義 작가들은 오로지 개인의 정신만을 중요시한 결과 내면묘사에 치중해서 객관성의 존재가치조차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감상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고통을 주리만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모두가 정신성만을 중요시 했음에 기인되는 것이었다.
요즘 미국의 현대미술이 차원적次元的인 것을 배격하고 단일한 평면 공간을 강열한 원색으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나 역학力學을 이용한 거대한 현대조각,네온사인을 주로 한 광선,전자학적인 것이나 엘리멘트Element의 힘을 이용한 공기조각,인봐이런멘털 예술,폴리에스터를 이용한 입체 구성 등은 인간의 정신성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현상과 인간의 육체성을 결부시키려고 하는데만 치중하고 있다.
그것이 자아내는 결과는 오락적인 가치 외에는 별다른 의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감상자들이 이것을 예술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시네마적인 것이다. 만일 그 작가들이 이것을 현대 미술이라고 부른다면 보다 더 위대하고 살아 있는 예술작품은 전자기계나 아폴로 우주선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감상자들이 그것을 일시적인 오락물이라고 하여도 그들은 반박할 아무런 요소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 작가들은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미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또한 프랑스에 비해 보면 우리의 현대미술은 너 무나 짧은 연령을 가졌고 일본에 비해 볼 때는 그들은 우리 미술가들과는 사회적 위치에 차이가 크다.
그들은 유명해지면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나라의 미술인보다도 대우를 받고 있다. 이런 경제적,사회적 혹은 국가적인 뒷받침 없이는 우리의 현대미술이 국제성을 지니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다른 나라들과 같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 질 때까지 서산西山을 바라보는 격으로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미술계는 지금 대단히 위험한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다. 우리 화단에서도 프랑스나 미국,일본에 있는 모든 유파流派의 움직임이 형식적이나마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척 불안정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어느 누구를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손으로 우리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이것,내일은 저것 하는 식으로 방향을 정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외국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모방만 하다가 미술의 식민지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올바른 방향이란 어떤 것인가하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미술가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고 꾸준히 탐구하며 몰두해서 일하는 가운데서 자기 모름지기 방향이 정해지는 날까지 노력을 하라고. 그것이 곧 창조정신이 되는 것이며 이 창조정신이야말로 독자적인 작품을 만드는 원소元素가 되는 것이다.
그 독창적인 작품만이 국제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말없이 꾸준히 일을 하면 된다. 작가의 진정한 대변인은 그의 작품이다.
월간중앙,197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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