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화백 · 남긴 글 · 03
그림을그릴때가제일행복합니다 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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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릴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남 관
그림이란 무엇이냐? 한마디로 말하여 삶의 축적이자 내 인생입니다. 그림은 내 거울입니다. 거울은 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내겐 꼭 필요한 존재이고 좋은 반려伴侶입니다. 그림 그리기는 정신과 육체의 힘을 쏟아붇는 힘겨운 노동입니다. 피를 쏟는 작업의 대가代價로 하나의 작품이 얻어집니다.짧게는 1주일,길게는 3-4년이 걸려서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지요. 젊은 날에는 침식寢食을 잊고 밤을 새워 그런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고 지나간 50년 동안에 하루 평균 10시 간썩은 꼬박 캔버스와 씨름한 셈이니 내 인생이 곧 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좋아서 그리는 그림은 나의 분신입니다.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작화에 몰두할 때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은 어느덧 내 신앙이 되고 말았지요. 허허허.
7년 전이던가. 세검정洗劍亭 옆에 살던 소전素筌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도 권하길래 이곳 산중山中으로 이사 왔죠.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338의 32번지.
낮은 지대의 반값으로 두 채의 집을 사서 하나로 합친 다음 2백40평 대지 위에 내 취향에 맞춰 지은 집이랍니다. 앞 산 뒷 바위가 모두 내 정원이요,뻐꾸기와 참새들은 내 벗이 되어 조석朝夕으로 노래를 불러 준답니다. 나는 집을 바꿀 때마다 되도록 높은 대지를 선택합니다. 이왕이면 높은 곳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살자는 욕망,높다랗게 앉아 시야가 넓은 전망을 바라보며 살고 싶은 충동 때문인지도 몰라요. 여기 새는 눈앞에 멀고 무궁한 공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참 좋은 환경이지요.
사람들은 날더러 화백이라고 부릅니다. 화백이란 말은 그림 그리는 사람에 대한 존칭인 것 같은데…
왕조시대에는 화가를 천대하여 환쟁이라고 멸시 했었지요. 일제때에는 조선선전朝鮮鮮展에 입상했더라도 조선인에겐 함부로 화백이란 칭호를 붙여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젊은 사람까지도 너 나 없이 화백이라 남발하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 표현인 것 같아요. 어지간히 나이도 먹고 당당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만이 화백이라 대우 받을 수 있음직한데 말이요. 나는 칠순이 넘었으되 아직 화백이라 자칭할만한 위인이 못되고 또 아호雅號란 것도 일부러 갖지 않습니다. 내가 추구하는예술의 심오한 경지를 아직 찾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대가연大家然하고 아호를 붙이다니 망발이 아니겠느냐 그 말입니다. 좋게 보면 서양식이고 나쁘게 보면 비한국적非韓國的이라고나 할까요. 화백이란 말은 원래 중국에서 나온 것인데... 서양에서는 도무지 화백이란 표현이 없고 그저 화가라고만 부를 따름이지요· 아티스트 페인터,예술적으로 페인트 칠을 하는 장인匠人이란 뜻이에요.
흔히들 음악가나 미술가, 그리고 철학자들이 봉두난발-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니질 않습니까. 그러다가 최근엔 우스꽝스럽게도 비틀즈란 유행의 형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기다란 머리는 멋으로 기른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게을러서 깎지 않은 것은 더욱 아닙니다. 자기 일에 너무 열중하다보니 머리를 매만지거나 옷치장에 신경 쓸 틈이 있어야지요. 시간에 기는 사람은 차림새를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서양에서는 형식주의보다는 실용주의를 숭상하니까 봉두난발이 용납됐을 뿐이지 예술가랍시고 뽐내느라고 장발을 기르고 멋을 부리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네가 잘못 받아들였을 따름이지요.
보시다시피 나는 평생 몸치장을 안 합니다· 얼굴 생김새도 촌뜨기 같은데다가 아무 것이나 입고 한 가지를 갖고 30년씩 입습니다. 54년 파리로 떠날 때 영국 천으로 만들어 입은 양복을 지금까지 입지요. 언젠가 아내가 낡았다고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되찾아다가 털고 아끼고 입고하지요. 하하하.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야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다는 속담이 있지 않아요. 이것 저것 기웃거리며 왔따 갔다 하다가는 샘물도 못 마시고 굶어 죽어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술의 세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평생을 두고 한 가지 일에 정성을 쏟아야 무언가 큰 것을 얻을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어내듯이 끈기 있게 오래도록 정진해야 대성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본시 우리 집안은 불교를 믿었다는데, 나는 아직 종교를 가져보지 못했어요. 신앙의 필요성은 항상 느끼면서도 철이 덜 나서 그런지 얼른 믿게 되지를 않는군요. 서양사람들은 대개 가톨릭이 아니면 예수교를 믿는데, 하나님은 곧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들 하더군요. 가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정신세계를 말하는 모양이죠.
예술의 세계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가시적인 세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찾는데 진미眞味가 있습니다. 현대미술의 80%는 가시적인 것이지만 이는 너무 통속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령 삼각산을 그린다고 칩시다. 있는 모양 그대로를 표현하자면 메커니즘을 통한 사진이 으뜸이겠지요. 그러나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회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것보다는 신비로운 삼각산의 정신,그 불타는 정열과 기상을 그려내는데 생명력이 있읍니다.
사진은 삼각산이 지난 내면세계나 정신세계를 그려내지는 못합니다. 이처럼 나는 정신세계에서 사실하는 방법을 추구합니다. 때문에 내 그림은 추상적이라는 평을 듣고 비구상非具象으로 분류되고 있지요. 나는 그것이 불만입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는 것도 못마땅 합니다. 사실 나는 어느 파派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내 나름대로의 남관파南寬派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서양문물을 직수입하지 않고 일본을 거쳐 간접 수입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동양화,서양화니 구상,비구상이니 하는 것은 일본것의 직번역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동양화,서양화라 구분하는 표현을 쓰지 않아요. 그저 회화라 통칭하지요. 다만 사용한 재료에 따라 기름으로 그렸으면 유화, 물감으로 그렸으면 수채화 또는 일본화라 분류할 따름입니다. 이것도 옳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물감으로 그린 서양화는 뭐라고 이름 지어야 합니까. 그러니 재료에 따라 동·서를 구분함은 합당치 않습니다. 나로서는 그리는 주체에 따라 구분,동양인이 그리면 동양화고 서양인이 그리면 서양화다 ... 이런 생각이지요. 소전素筌(孫在馨)도 ‘일리있다’면서 내 주장에 공감을 표시 했었지요.
참고로 말한다면 사실화는 형태를 중요시하니 형이하학적 形而下學的이요, 반대로 추상화는 형태 를 무시하니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며 철학적이죠. 구상은 구체적으로 형태를 그리는 것이고 비구상은 구체적인 형태를 그리는 대신 상징적으로 그리는데 특정이 있읍니다. 중국의 경우 북종화北宗畵가 색을 배합하는 자연주의적 산수화라면 남종화南宗畵는 먹을 구사하여 추상적인 마음과 정신을그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중세기로 올라가 봅시다.
그때는 신神의 얼굴 하나만 잘 그리면 걸작이 됐읍니다. 광명의 빛 한 가지만 잘 표현해도 걸작이었읍니다. 그러나 현대의 심미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화면 전체가 문제 됩니다. 구성(콤퍼지션)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전체적인 조화 - 그것은 곧 현대 미술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모체가 다름 아닌 입체파(큐비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입체라 함은 조화 있는 구성뿐 아니라 어떤 물체를 해부하는 뜻까지 지님으로써 전체화면에 균형을 부여해 주는 방식입니다.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숱한 번민과 실망과 비애와 고독을 체험 합니다. 고독을 이기기 위하여 일을 시작합니다. 손과 붓과 채색은 평면 위로 활주합니다. 직선,대각선,삼각, 사각, 면 등이 곡선의 포옹에 융화되어 갑니다. 이때 묵상의 세계는 더욱 심화됩니다. 내면에 축적된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묵상이 엉클어져 마침내 하나의 형태를 띠고 나타납니다. 그것이 곧 창작이지요.
미술형식의 흐름을 살펴본다면 가장 정신적인 기원전의 원시예술,신을 위주로 한 중세기의 환상적인 예술을 거쳐 보다 인간적인 것을 추구한 르네상스로 넘어 왔읍니다. 신보다 인간을 내세운 작가로는 미켈란젤로,라파옐로,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셋을 들 수 있읍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중세기 이후를 구분하되 자연주의(밀레),낭만주의(콜로, 드라쿨로아),사실주의(쿠르베), 인상파(전기=모네, 시슬리. 후기=고갱,고흐,세잔),입체파(피카소,브라크),야수파(마티스)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지요. 그들은 음악,문학,연극 등도 이런 시대적 유형을 따라 변천해 왔다고 말합니다. 미술이 예술의 발전과정을 선도해 왔다는 견해이겠지요.
어쨌든 앞으로의 우리 화단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다 통용되고 인정받는 그런 방향을 모색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통적인 동양화,외래적인 서양화 따위로 이것 저것 구별할 것 없이 시대적 감각에 맞는 것을 새로이 개척해 나가야합니다.
수구적守舊的인 생각을 버리고 전진적인 자세로 나아갈 때 우리의 진면목은 나타날 것이고 그래야만 서양서도 환영받을 수 있읍니다. 또 작가는 무슨 주의主義,무슨 파波에 구애되거나 개의치 말고 양심적인 자기 세계를 개척하고 구축해야 합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든 추상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안일하게 남의 것을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뚜렷한 개성이 없으면 창작품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68년도 국전國展때의 일입니다. 나는 서양화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작품심사에는 참여했는데...
서희환徐喜煥의 서예작품에 최고영예인 대통령상을 주자기에 나는 분연히 반대하고 퇴장해 버렸읍니다. 결코 특정인의 수상에 감정적으로 반대한 것이 아니고 작품 자체의 수준에 불만을 표시한 겁니다. 그 붓글씨는 개성 있는 창작품이 아니라 소전素筌(손재형체孫在馨體)의 모방품이었기 때문이죠. 그때 소전은 국전심사위원장이었고 수상자는 그의 제자였습니다.
후진들은 모름지기 뚜렷한 주체의식과 방향감각을 갖고 내 것을 만들고 가꾼다는 자세로 공부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출세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아니 됩니다. 3년 전 프랑스 파리에 들렀더니 20-30년 전 내가 공부할 때와는 판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진지한 대화와 실력 경쟁의 광장이요, 위안의 낙원이었던 파리가 타락했더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출세주의자들의 사교장이 되었고 화상은 상업주의적인 경영을,미술관은 오락주의적인 전시효과를 노리는데 급급 했읍니다. 작가는 고독한 법입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야합니다. 고독을 이기기 위해 고독을 씹으며 갈고 닦는 작업을 거듭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의 탈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폴 세잔(불인佛人)을 보십시오. 그래야만 대성 합니다. 값싼 성공은 신기루요,환상일 뿐입니다. 오래도록 외곬으로 치닫는 곳에서 얻는 보람이라야 진가가 나타납니다.
프랑스에게서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어요. 또 되지도 않아요. 따라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 같은 것도 없읍니다. 벽돌을 쌓듯이 한 장씩 쌓아 올리는 프랑스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배울 점이라고 봅니다. 기술자가 경영진에 참여하고자 넘보지도 않거니와 중역이 되지도 않습니다. 레스토랑 하나를 경영하더라도 3-4대代씩 이어 왔다는 자부심과 전통을 자랑삼아 손님을 유혹합니다. 그림을 놓고 봅시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빨리 그려내지만 시간이 갈수록 퇴색해 버립니다.반대로 서양사람들은 생각하고 구상하느라고 더디고 느리게 그리지만 두고두고 질감이 나타납니다. 배우는 사람은 우쭐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재치가 끈기를 이길 수 없읍니다.
본시 나는 촌놈입니다. 경북 청송군 부남면 구천동 778번지에서 태어났지만 조상의 고향은 안동군 길안면 남촌입니다. 영양남씨가 많이 산다고 남촌이라 부르는 모양이더군요.
생일은 1911년 11월25일. 한일 합방 이듬해에 태어난 목숨이죠. 촌장을 지낸 아버지 남영환南永煥와 어머니 하•• 는 슬하에 3남매를 두었는데 내가 그 맏아들이죠. 누님은 남•,아우는 남암南巖이라 합니다. 농가의 아들로서 다섯살 적부터 서당에 다녔으나 따분하게 한문이나 읽는 것이 나는 싫었습니다. 여섯 살에 부남보통학교에 입학,3년 후 청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으며 6학년을 졸업할 때는 열다섯 살이었죠. 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나는 손재주가 있었던지,아니면 장난꾸러기였던지,종이나 땅바닥에 뭔가 그리기를 좋아했답니다. 이른바 독학인데 내 그림은 수작으로 뽑혀 교실에 곧잘 나붙었답니다. 청송학교의 학우로는 박주•(전 국회의원) 심진섭沈眞燮(양조장)이 있었지요.
보통학교를 마친 나는 대구고보大邱高普 등에 진학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반년쯤 쉬다가 후에끼笛水 교장선생의 소갯장을 들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지요. 후에끼 선생은 ‘너는 도화를 잘 그리니 소질을 살려 더 공부해 보라’고 격려해 줬읍니다. 동경에 도착한 나는 보통학교선배인 이상우李相愚씨(일본대법과)를 조시가야雑司谷 하숙집으로 찾아갔고 김영대金英大씨(입교대 영문과)등의 지도를 받으며 l년 동안 진학준비 공부를 했지요. 이듬해 와세다 중학에 들어간 나는 3학년을 마치자마자 당초 계획대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태평양미술학교 본과에 들어갔지요. 교장 나까무라中村不折 선생 등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소화昭和 10년(1935)에 졸업 했어요. 그때 나이 24세의 청년이었읍니다. 태평양미술학교는 우에노上野 밑 야나까谷中에 있었는데 2차대전 때 폭격을맞아 없어지고 지금은 닛뽀리日沒里에 재단사무실만 남아서 명맥을유지 하고 있다더군요. 태평양太平洋에서 미술을 공부한 동문同文으로는 구본웅具本雄 선배가 있고 조병덕趙炳悳, 박득순朴得錞, 손응성孫應星,최재덕崔載德 등 후배도 많습니다.
태평양 졸업장을 들고 교문을 나선 나는 구마오까씨態岡美彦가 경영하는 태강회화도장態岡繪畵道場에 들어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연수생활을 했읍니다. 그 시절 그린 작품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동광회東光會,국화회國畵會,문전(문부성미술전시회) 등에 출품되었고 마침내는 동광회 회원으로 추천되었지요. 그무렵 후나오까船岡 상을 탄 작품은 「노인상」(60호)이었는데 마이니찌 신문에 크게 소개되었지요,「여인좌상」 (100호)이란 그림으로 미쓰이三井 상을 탄 것도 그시절이었어요.
汤捯 捤獥 해방 후 귀국한 나는 48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열고 30여 점의 그림을 내건 이래 해마다 한 번씩 작품전시회를 가졌지요. 49년 전시 때 장기영張基榮씨(한은韓銀 조사부장)가 「호박을 이고 가는 소녀」를 사간 것이 기억납니다. 외국에서의 첫 개인전은 53년 동경 은좌銀座에 있는 포름화랑에서 열었지요. 그로부터 지금가지 30여 년 동안 도합 30회의 개인전과 20여회의 초대전을 열었는데... 외국에서의 큰 전시회만 손꼽아 보더라도 프랑스 파리에서 네 번,함부르크,만하임 등 독일에서 세 번, 룩샘부르크와 스위스에서 각각 두 번,그리고 브뤼셀전이 기억됩니다.
나는 생각하는 바 있어 54년 12월 서울을 떠나 일본 요꼬하마에서 배를 탔읍니다. 파리행이었읍니다. 한 달 동안 배를 탄 끝에 마르세이유에 내리니 꽃피는 봄이었읍니다. 그로부터 68년까지 14년간의 프랑스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캄보디아호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나는 인종 전람회등 기행문과 데생을 한국일보에 기고 했읍니다. 장기영 사장과의 사전 약속에 따른 것이었죠. 반 고흐의 무덤을 참배한 이야기도 써 보냈읍니다. 나는 파리에 정착한 뒤 3년(55-58년) 아카데미 들 라 그랑드 쇼미에르서 피나는 수업을 쌓았습니다. ‘새로운 경지를 개획하자’는 욕망에서였지요.
그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읍니다. 학비가 모자라서 약 2년동안 값싼 방,감자,우유만 먹었더니 머리가 다 빠집디다. 이 대머리는 고생스럽던 파리생활의 선물입니다. 그처럼 고생하게 된 까닭은 한 사람의 위약違約때문이었죠. 54년 월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미도파 화랑에서 도불전 渡佛展을 열었고 거기서 얻은 수익금(3천달러로 기억된다)을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에게 맡겼죠. 이자조利子條로 매월 50달러씩 학비를 보내 달라는 조건으로... 이 돈은 가톨릭에서 경영하던 한영방적韓榮 紡績에 맡겨졌다는데 당시의 김규성金奎成 사장이 꿀쩍 삼켜버리고 학비를 한 푼도 보 내주지 않았더랍니다. 때문에 호구지책으로 몽마르트르에 나가 초상화를 그려주고 몇 푼씩 받는 아르바이트를 했었지요.
58년 살롱 드 메에 초대 받아 작품을 내걸 때부터 화랑과 화상이 접근하기 시작했고 수채화 과슈가20달러에 팔린 것을 효시로 점차 수입이 생기면서 살기가 나아지더군요. 내 생애의 역작은66년 제 6회 망통대상을 탄 작품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古跡」이라고 생각 되군요. 그것은 영광스럽게도 이탈리아의 트리노 미술심미원審美院에 소장 됐읍니다.
68년에 그린 「낙조落照」(살롱 드 메)도 힘을 기울인 작품이었어요. 나는 지난 8월 17일부터 한 달 동안 덕수궁에서 가진 회고전에 이르기까지 총 3천여 점을 그런 셈이고 물감과 기름만도 5 드럼을 소비한 것 같아요. 처녀작은 「누드」였고 최선작은 「나의 친구를 위한 기념비」,「마음에 비친 일그러진 상像들」입니다. 내 화실엔 7백점의 작품이 쌓여 있읍니다. 나는 특히 환상적인 청색靑色과 자색紫色을 좋아합니다. 내 작품이 걸려 있는 곳으로는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동양의 풍경」,,파리 시립현대미술관 「허물어진 제단祭壇」,룩셈부르크국립미술관 「동양적인 구성」,프랑스 문화성 「흰 공간」, 스위스 로잔공과대학 「동양의 상징」,「푸른 환상」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독일 등 세계 각국의 미술품 수집가들이 내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날에도 특별한 로맨스가 없읍니다. 미술에 미친 사나이에게 무슨 여인이 붙겠어요. 프랑스에서 사권 여인이 있긴 했으나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답니다. 용기 있게 고백했더라면 불이 붙는건데… 융통성 없이 그림만 사랑하다 보니까 결혼도 퍽 늦었지요. 마흔 아홉 살에 서른세 살의 아내를 맞이했으니까요. 나는 60년 l월 17일 영국 런던의 어느 교회에서 김진옥金眞玉과 결혼했지요. 아내는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 선생의 따님으로 미시간대를 졸업(문학석사)하고 런던대 및 소르본대에서 수학했으며 「나신裸身」등 소설을 썼지요. ‘무자식 상팔자’란 말이 있거니와 우리 내외는 각기 다른 분야에 몰두하다보니 자식 두는 것조차 잊어버렸답니다.
나는 68년부터 정년퇴직하던 76년까지 9년 동안 홍익대에서 미술학美術學을 가르쳤어요. 지금은 72년 이래 가진 미협 고문직만 지키고 있지만... 홍익대와 나는 처음부터 인연이 있었읍니다. 1949년이던가,홍익대학에 미술학과를 창설할 때 나도 참여한 사람입니다. ‘일본식아카데미즘 을 탈피하여 서구식 미술학교를 세우자’면서 윤효중尹孝重씨를 중심으로 이상범李象範, 이응노 李應魯 그리고 내가 주동해서 교수진을 짜고 배운성裵雲成씨를 미술학과장으로 모셨어요. 당초 홍문관 대학관으로 출발했던 홍익대는 문학부,법학부,정경학부를 가졌는데 우리는 문학부속에 미술 학과를 새로 창설한 것이었죠.
홍익 본관은 삼각지 연병장 근처인 문배동에 있었고 미술학과는 원효로의 어느 절간(사찰)을 얻어 썼습니다. 6·25동란으로 부산에 피난 가서 51년에 재건할 때는 미술학부가 되었고 설초雪蕉(이종우 李鍾禹)를 부장으로 삼아 윤효중尹孝重,김환기金煥基 그리고 내가 참여했읍니다. 나는 49년에 한두 번 홍대에 출강하다가 이내 임숙재任淑宰 총장의 초빙으로 숙명여대 교수로 옮겨 갔었지만… 초기의 홍대졸업생 중에는 박석호朴錫浩(1회·서양화),김정숙金貞淑(1회·조각),박서보朴栖輔(2회·서양화)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날 훌륭한 종합대학으로 발전한 홍익대의 상수동 캠퍼스를 보면 감개가 무량합니다.
주간한국,198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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