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남관 - 80년의 생애와 예술' 화집에 실린 글이다.



남관의 예술

 

                                                                                              이 경 성 (국립현대미술관장)

 

1

   197411월 신세계미술관에서 초대된 남관작품전에 즈음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서문을 쓴 바 있다.

   “화가 남관씨가(1953) 도불을 앞두고 개최한 기념 작품전은 인상파 전기를 기점으로 파생적으로 발달되어 현대에 도달한오늘의 한국 화단의 주류 속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화단적 위치가가장 정통적인 것을 논리적 필연으로 경과하였고 오늘날 현대적 조형공간의 감각세계에서 창조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역력히 보여준 본격적이며 의지적인 전람회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의 본질이 되어 있는 색채의 감도나 투명한 주체감각은 이러한 그의 조형정신이 구상주의적 기법 속에서 어느 형상가치와 색채가치와 대상가치를 얻으려는 고민의 결정이고 동시에 그가 의도적으로 지양하려는 감상적 향토취미의 문제라든가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비주지적 요소 같은 것은 정서가 주조로 되어 있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생리이며 체취인 것이다.

   그의 예술의 저류를 흐르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체질에서 오는 비타협성과 고독성인데 그것은 결국 그 자신의 세계인 비현실의 세계를 현실로서 생활하는 인간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하겠다 .

   전체적으로 작품 하나하나는 치밀하고 철저한 화가의 배려와 탁마의 흔적으로 빛났으며세련된 색감그리고 선과 형태의 교착에서 오는 오묘한 평면구성이 돋보이고 현대조형예술이 예의 해명하려는 색채와 선과 면의 비례의 균형 문제 같은 것이 능숙한 솜씨로그리고 새로운 국제적 감각으로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5년 후 한국에 돌아온 남관은 자기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1969년의 귀국전은 그와 같은 변모되고 심화된 예술가로서의 남관의 참모습을 알아보기 좋은 기회였다.

   1954년부터 1969년까지 한 예술가가 파리의 하늘 밑에서 겪어야 했던 생생한 기록은 문자로서는 그가 쓴 여러 글 속에서 알아볼 수 있으나 심화된 예술의 기록은 그의 작품 위에 큰 자취를 남겼다. 한 예술가가 삶에 충실하고 또 예술을 위해 순교한 시간과 공간의 흔적이 화면 위에 표상된 것이다.

   남관의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정화된 인간의 비극정신이라고나 할까. 혼란과 질서유기와 무기그리고 기억과 무의식이 하나의 공간 속에 용솟음치고 있다. 그와 같은 이념들은 응결과 확산이라는 두개의 방향으로 서로 당기면서 광물적인 음향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남관이 도달한 것은 생의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그곳에서 그는 미의 가상 속에 실현된 또 하나의 인생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정지를 모르는 미의 순례자인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세계를 탐색하고 있다. 그 탐색이 바로 근작에서 보여 준 예술세계이다. 그 예술세계는 가장 독창적이며남관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차원 인 것이다.

   여기서 남관은 그가 몸소 겪은 비극을 지양하고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자기와 자기를 보는 삶들을 이끌고 간다. 그 표상이 바로 채색된 공간과 기호화된 조형의 세계인 것이다"

   19549월에 미도파화랑에서 개최된 도불 작품전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하나의 계기가 된다. 그것은 남관이 해방 후 처음으로 도불하는 화가였고 그를 뒤따라서 매년 많은 화가들이 도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전에는 67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는데 그 때의 작품은 전부 구상적인 작품이었다. 그 속에서도 인상에 남는 작품은 비 내리는 거리」「두 노인」「화실」「오후 3」「달과 고정」「시들은 꽃」「작약」「창 밖」「정물」「각접시」「교회당과 달」「포도 있는 정물등 이었다. 이 최초의 도불전에 즈음하여 남관 후원인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카다로그에 실려 있다.

   “남관의 예술세계에 관해서는 이미 소개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의 작품 역량은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다고 볼 수 있으며제작 의욕이 왕성한 장년기에 들어서 있는 화가로서 우리 화단에서 가장 존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한사람입니다.

   이번에 도불을 기념하여 개인전을 갖게 된 것을 우리는 충심으로 축하 합니다.

아시는 바우리 화단에서는 해방 후 아직 회화 부문에서는 단 한사람도 해외 파견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첫 사람으로 남관처럼 우수한 분을 보내게 되는 것을 더욱 기뻐하는 바입니다.

   미술의 전통을 자랑하는 불란서를 보고 온다는 것이 우리 화단에 도움이 된다면 이를 계기로 하여 많은 화가들을 보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의 예술과 장한 의도를 받드는 의미로여러분의 적극적인 후원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2

   구상작가인 남관이 언제부터 비구상으로 변모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1954년 도불전 때는 분명히 구상적인 작품을 제작한 남관이1955 년부터 파리에서 살면서 서서히 비구상으로 변모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1958년 살롱 드 메에 초대된 작품이 비구상적인 회화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적인 변모를 거듭한 결과화가 남관은 1966년 프랑스 유일의 유서 깊은 망똥회화비엔날에서 영예의 일등상을 차지하였다. 이때 다른 수상자에는 타피에스나 폴리아코프 등이 있는 것을 보아도 그의 국제적인 위치가 얼마나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611즉 망똥회화비 엔날에서 일등상을 수상하던 해 그는 서울에 돌아와서남관서울전을 개최하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완전히 비구상적인 회화로 탈바꿈했기에 그의 예술의 기초는 그 이전에 이미 확고한 방향을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파리에 정착하면서도 남관은 서울 화단과의 연락을 끊지 않고 계속 취하였다. 19694월 국립공보관에서는남관체불작품전이라고 해서,「강변외에 51점의 작품을 전시한 바 있으며 19725월에는 현대화랑에서 남관작품전을 개최하였는데여기에서도 봄의 인상외에 50 점의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19818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격적인 남관초대전을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 원시적인 군상외에 255점을 전시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화가 남관이 체험한 다음과 같은 기억을 토대로 해서 한국전란의 생생한 기억이 담겨 있는 작품을 전시하였다.

   “나는 두 개의 전쟁즉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동란을 체험하였다. 나는 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보았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몸은 나에게 대낮의 태양에게 비로소 노출된 고대 사원의 벽에 헐려진 돌과 같이 보였다"

   다시 말해서 화가 남관은 비극적인 생의 체험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여과시켜서 고대 상형문자로 되돌림으로써 역사와 현실생과 사의 교차하는 예술의 세계를 실현하였던 것이다.

   19836월에는 서울국제화랑에서남관소품전이 열렸고198411 월에는 중앙갤러리 개관기념으로 남관 창작 50년의 예술세계라는 회고 전이 개최된 바 있다. 여기에도 흑백상외에 61점이 전시되었다. 198710월에는 예화랑 초대로 남관초대전-푸른회상이 개최되었고19889월에는 현대화랑에서 남관초대전 1968~ 1988J이 개최된 바 있 다. 그리고 19903월에는 동경의 국제무역센터에서 남관전이 개최 되었다.

이처럼 남관은 죽을 때까지 파리에도 화실을 두고 서울과 파리를 왕복하면서 그의 화업을 한국에다 전달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관은 서울에서 보면 파리에 살고 있는 작가이지만 파리에서 보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작가였다.

 

3

   나와 화가 남관과의 관계는 일찌기 1954년 도불전 이래 우정으로 시작 되었다. 당시 경향신문에 남관도불전에 대한 평론을 쓴 바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러 번 낙원동 다방에서 만나 차를 마시기도 했다. 그가 파리로 떠난 후 돌아와서 전람회를 열 때에도옛 교분을 새롭게 했지만그와 매일 만나게 된 것은 본인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장으로 재직시 파리에서 돌아온 화가 남관이 그곳의 교수로 들어서고서 였다. 천생 고독형인 남관은 술을 즐기지 않고 사람과의 사귐도 그리 잦지 않아서 꽤 오랫동안 홍대교수 시절이 있건만 이렇다 할 개인적인 에피소드는 없다. 다만 그가 전람회를 할 때나무슨 일이 있을 때 자하문 밖에 있는 그의 화실을 몇 번인가 방문해 그의 근황을 알았을 따름이다.

   화가 남관은 한국의 근대부터 현대에 걸치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화가의 한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망똥회화비엔날레에서 타피에스나 폴리아코프 등과 더불어 상을 탔건만 오히려 국제적인 평가는 그들에게 뒤지고 말았다. 그것은 남관을 포함해서 한국의 현대작가들이 외국에 살면서도 그 지역사회나 국제적인 사회에 올바르게 발을 못 붙이고 정상적인 평가를 못 받았다는 한국적인 비극이 그로 하여금 파리에 살면서도 한국의 화가가 되게 한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미술은 그 주관적인 요소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와 해설의 첨가가 필요한 것이다. 만약에 그의 주변에서 그의 작품을 사랑하며 해설하려는 평론가가 있었다면 그는 타피에스나 폴리아코프 못지않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40년 동안 죽을 때 까지 파리를 오고 간 화가 남관의 예술가적인 생애는 그의 재능을 탓하기 보다는 그가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현대미술의 비극이라고 보아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화가 남관의 문제는 곧 한국현대미술이 풀어야할 숙제 중 하나일 것이다.